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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40문 40답으로 알아보는 11·3 학생독립운동 11·3 학생독립운동은 이후 민족·민주화 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11·3 학생독립운동 정신의 계승 37 11·3 학생독립운동에 참가한 학교는 한동안 194개교였습니다. 조선 총독부의 자료를 그대로 교과서에 실었기 때문입니다. 2006년 광주광역시교 육청의 조사 결과 320개로 확인되었으며, 이후 학생독립운동기초자료 발굴팀에 의 해 350여개의 조선인 관련 학교가 참여하였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일본과 중국, 러 시아, 미국 등 해외를 포함할 경우 더 늘어날 수도 있다고 합니다. 11·3 학생독립운 동은 학생이 주축이었지만 각종 청년단체, 노동단체, 신간회, 해외 독립운동단체들 도 참여한 3·1운동 이후 최대 독립운동이었습니다. 11·3 학생독립운동으로 퇴학 582명, 무기정학 2,330명, 검거 1,462명이었습니 다. 광주 지역에서만 173명이 재판을 받았습니다. 대구복심법원에서 장재성은 4년, 김상환·송동식·조길룡은 2년, 왕재일은 1년 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을 받은 졸업생을 제외한 재학생들은 모두 퇴학을 당하였습니다. 1929년 11월 광주고보생들의 항일투쟁은 10여년 뒤 광주고보를 이은 광주서공 립중학교(광주서중) 학생들이 이어갑니다. ‘무등회 사건’이 그것입니다. 해방 후 광주고보생들의 항일독립운동은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시대정신으로 구현됩니다. 1972년 유신헌법과 박정희 독재정권에 정면으로 맞선 학생들이 바로 광주고보와 광주서중을 계승한 광주일고 학생들이었습니다. 1974년 10월 교내 시위에 이어 11월 15일에는 충장로, 도청으로 진출하여 ‘유신 철폐’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1975년 5월 1일 개교기념일을 맞아 세 번째 유신반대 시위를 기획하였지만 사전에 누설되어 3명이 구속되고 16명이 제적되었습니다. 박정희 독재에 맞서 광주일고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한 것은 ‘광랑’과 ‘피닉스’라는 학생 비밀 조직이었습니다. 1929년 학생독립운동과 성진회·독서회, 1940년대 제 2차 학생독립운동과 무등회처럼 1970년대 반독재시위에는 광랑과 피닉스가 있었 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