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page

81 40문 40답으로 알아보는 11·3 학생독립운동 불려가 심한 욕설과 체벌을 당하였습니다. 이 일로 밀고 혐의가 있는 하급생 7∼8명 을 학교 무도장 뒤에 집합시켜 놓고 체벌을 가합니다. 경찰이 나서 주모자를 검거하 자 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 사항을 내걸고 동맹휴학을 단행하였습니다. 동맹휴학이 일어난 지 며칠 뒤 광주사범학교에서 열린 ‘전남도내 모형비행기대회’ 를 관람한 일부 서중학생들이 일본학생들을 구타합니다. 이를 계기로 검거선풍이 불었고, 그해 8월까지 350여 명이 잡혀갑니다. 일제는 다음 해인 1944년 2월까지 장기간 조사를 하면서 30여 명을 구속하였으 며, 이들 가운데 기영도와 신균우는 징역 장기 4년 단기 2년, 남정준은 징역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일제는 조사 과정에서 관련자 모두에게 악독한 고문을 가하였습니다. 기환도는 수 갑을 채운 채 심야에 경양방죽으로 끌려가 물속에 쳐 넣어져 발길질로 채이며 고문 을 당하여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사망합니다. 강한수와 윤봉현도 모진 고 문을 이기지 못하고 재판을 받기 전에 사망합니다. 주만우는 고문 후유증으로 감옥 에서 옥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고문치사를 병사로 조작하여 허위보고 하는 뻔뻔스러움을 보입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해방이 돼서야 풀려 나왔습니다. 이것이 ‘제2차 무등회 사건’입니다. 제2차 11·3 학생독립운동이라 불린 ‘제2차 무등회 사건’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 구하고 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이 학생들에게 면면히 계승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 습니다. 1. 일어사용 반대 3. 내선일체 반대 5. 차별교육 반대 2. 창씨개명 반대 4. 일본상품 불매 6. 조선독립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