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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40문 40답으로 알아보는 11·3 학생독립운동 학생들의 2차 시위에 대해 일제는 어떻게 대응하였나요? 11월 3일, 그 날 25 제2차 시위 직후 광주에 있는 한국인 중등학교에는 또 다시 휴교령이 내려지고 무 자비한 탄압이 본격화됩니다. 이날 시위에 참여한 학생 수가 500여 명이었는데 과반수에 가까운 학생들이 검거되 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라남도 각 군의 사회·청년단체 간부들 160여 명도 광주에 서의 대 시위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검거되었습니다. 한꺼번에 수백 명이 잡혀 들어오자 삽시간에 경찰서 유치장은 초만원이 되었으며, 일부 학생들은 경찰의 무도 훈련장이었던 도청 앞 무덕전에 수용되었습니다. 또한 각 학교의 비밀결사가 탄로나면서 성진회·독서회 등에 관련된 학생들이 다음 해 1월까지 계속 검거되었습니다. 심지어 오쾌일·유치오·임주홍 등은 동경에서 잡 혀옵니다. 구속된 학생은 200여 명이었는데, 이는 당시 광주 지역의 중등학교 학생 수의 5분의 1에 해당합니다. 경찰의 탄압에 발맞춰 학교도 학생들을 무더기로 징계하였습니다. 광주고보에서 는 300여 명의 학생을, 광주농교는 시위에 참가한 100여명을 무기정학에 처하였습 니다. 광주여고보는 시위에 참가한 17명을 무기정학에 처하였습니다. 이에 항의하 여 동맹휴학에 참여한 64명도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습니다. 전남사범학교는 문제 학생 37명을 일시 귀향시켰다가 이듬해 3월, 1명을 추가해 38명을 퇴학시켜 버렸 습니다. 이와 동시에 조선총독부는 제2차 시위 직후인 13일부터 12월 27일까지 학생독립 운동에 관한 신문보도를 금지시켰습니다. 항일독립운동이 다른 지역까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었습니다. 보도가 통제되자 오히려 갖가지 유언비어가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일본 순사 가 한국인 학생을 칼로 쳐 죽였느니, 폭동이 발생하여 광주가 쑥대밭이 되었느니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