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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40문 40답으로 알아보는 11·3 학생독립운동 1차 시위 이후, 사회 각 계층의 반응은 어떠하였나요? 11월 3일, 그 날 23 학생들에 의해 점화된 불길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각종 사회단체와 청년단체들이 즉 각적으로 관심을 표명하고 대표를 광주에 파견하였습니다. 11월 7일 조선청년총동맹과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조선청년학생회에서는 광주에 대표 를 파견하여 사건의 진상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협의하였습니다. 또한 신간회에서도 11월 9일 대표단이 광주에 내려와 광주고보와 광주중학교 교장 으로부터 진상을 듣고 사건의 불공정한 처리에 항의하였습니다. 광주의 청년단체와 학생들도 시위를 민족운동 단체와 연계해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제1차 시위 직후인 11월 5일 경, 장재성은 신간회 광 주지회와 광주청년동맹 등 광주 사회·청년단체 간부인 장석천과 강석원 등을 만났습 니다. 이들은 투쟁을 효과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학생투쟁지도본부를 결성하고 광주 및 전국 학생의 지도는 장석천이, 광주의 학생 지도는 장재성이 담당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장재성은 각 학교 독서회의 조직을 점검하고 광주고보·광주농업학교·전 남사범학교의 대표들과 만나 2차 시위를 논의합니다. 이들은 학생들이 다시 등교하는 11일(월요일) 대신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인 12일을 제2차 거사일로 결정합니다. 11월 11일, 장재성은 ‘조선민중이여 궐기하라’, ‘학생대중이여 궐기하라 우리의 슬로 건 아래로’, ‘용감히 싸워라 학생대중이여, 우리의 슬로건 아래 궐기하라. 우리의 승리는 오직 우리들의 단결과 희생적 투쟁에 있다’, ‘용감한 학생 대중이여, 최후까지 우리의 슬 로건을 지지하라. 그리고 궐기하라. 전사들이여 힘차게 싸워라. 힘 있는 데까지 싸워라’ 라는 4종의 격문을 작성하고 인쇄를 오쾌일에게 맡깁니다. 오쾌일은 소녀회 중심인물인 장매성이 흥학관에서 가져온 등사판을 이용하여 1,000여 장의 격문을 인쇄합니다. 1차 시위로 6일간 휴교(4일 월요일∼9일 토요일)가 끝난 11월 11일, 무장 경찰들이 삼엄한 경계를 폈지만 광주고보의 경우 등교한 학생은 40여 명에 불과하였고 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경찰은 시위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일단 해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