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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회종은 경기도 연천(漣川) 출신이며 본명은 영종(榮鍾)이다. 1905년 일제의 책동에 의하여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결되자 통분함을 금치 못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1906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김진묵(金溱默)을 부장으로 5백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적군과 유격전을 전개하여 큰 전과를 올리고 북으로 진격하여 혜산진(惠山鎭)까지 올라갔다. 이어서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비밀히 교환된 각서에 의하여 8월에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조인환(曺仁煥)·권 준(權俊)·김진묵 등과 함께 약 천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기도 양주(楊州)·파주(坡州)·적성(積城)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일제는 보병 제51연대 전변(田邊)대위가 인솔하는 보병 1중대와 산포병 1소대, 공병 1분대, 보병 제52연대의 1중대를 파견하여 견제케 하였다. 이때 약간의 피해를 입었으나 재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특히 9월 11일부터 13일에 걸쳐 적성·삭령(朔寧)·안협(安峽)·토산( 山) 등지에서 활약하여 장정 4백 명을 모집할 수 있었다. 이들의 활약상에 대하여 임진강 유역 일대와 경원 가도의 금화(金化) 일원의 애국적 주민들이 크게 동조하였다. 이에 놀란 일제는 평양(平壤) 보병 제52연대 제4중대장 상전(上田) 대위로 부하 1소대를 인솔하고 기차편으로 금천(金川)에서 하차하여 구화장(九化場)을 경유하여 토산으로 진격하게 하였으며 또 같은 중대에서 신계(新溪)에 파견된 중촌(中村) 소대에게 명하여 시변리(市邊里)를 경유 토산으로 나아가 상전(上田) 부대와 합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상전 대위가 인솔하던 적군은 25일까지 아무러한 소득 없이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한편 중촌의 부대 역시 토산·안협 등지로 왕회종 의진의 뒤를 쫓았으나 의진의 신출귀몰한 전략 때문에 그대로 귀환하고 말았다. 이에 이들은 다시 경성 보병 제50연대 제7중대가 금성(金城) 수비를 위하여 21일 경성을 떠나 23일에 토산에 도착하였다. 그때 의진은 안협에서 철원으로 옮겨 적의 우편 사무원을 척살하였다. 일군은 24일 의진을 향하여 철원쪽으로 진격하여 왕회종 의진의 1백 명과 접전하였다. 이때 아군의 피해는 전사가 14명을 내었으며, 의진에 협조하였던 석교촌은 적에 의하여 소각되고 말았다. 그러나 25일 적군이 철원에 도착하였을 때는 왕회종 의진은 재빨리 다른 곳으로 옮긴 다음이었다. 25일 의진은 철원 남쪽 심원사(深源寺)에 유진하고 있었다. 이들에 대하여 정보를 입수한 보병 제150연대 제6중대 1소대와 백정(白井)의 중대가 연합하여 심원사에 접근하여 26일 밤 포위하고 들어왔다. 드디어 27일 새벽 3시에 법화동(法化洞)에서 의병 150여 명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때 아군의 20명이 전사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본진은 이미 심원사를 철수하였으므로 적군이 심원사에 도착하였을 때는 텅 빈 절간이었다. 다시 오후 3시에 대광리(大光里) 동북방에서 의진 중 250명이 적과 접전하였다. 이때 아군의 피해는 80명이나 되는 격전이었다. 28일에는 적군이 모두 철원일대에서 철수하였다. 10월에 왕회종 의진은 경원가도의 동부로 진격하여 춘천(春川)·낭천(狼川)·양구(楊口)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에 적은 경성 보병 제55연대 제5중대의 기병·공병 약간을 파견하여 의진의 활약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1908년에 들어서면서 이들의 외로운 투쟁은 계속될 수 없었다. 1월말에 서울 30리 지점까지 진격한 바 있던 13도 연합 의진의 총대장 이인영(李麟榮)이 문경으로 돌아간 후 허위(許蔿)를 총대장으로 추대하여 임진강 일대로 집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이 일대에서 자리잡고 있던 왕회종 의진도 이에 합류하여 폭넓은 연합의진에 편입되어 활동 무대를 넓히게 된 것이다. 이들은 대외적으로 중국 혁명당과의 제휴룰 모색하는 한편 전국적인 규모의 연합 의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6월 11일 총대장 허 위가 체포되어 10월에 순국하자 임진강 일대에서 활약하던 연합 의진은 다시 독자적인 의진 구성으로 흩어져 갔다. 그후 왕회종은 만주로 망명하여 청년교육에 힘쓰다가 의병 운동 중에 당한 부상으로 인하여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