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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만세기 · 격문·경고문등을제작해 배포하띤서 시작되었다. 민족대표가직-성한독립선언서의 직접적인 배포망이 약했지만 개별적으로 「독립선언서」, r조선독립신문」, r국민회봐」 등을 입수하 여 이것을토대로각기 의견에 맞는선동문서를작성해농민들에게 배포하였다. 특히 운동 초기에 학생들은 단독으로 시위를 전개하며 지역 내의 투쟁 분위기를 조성했던 3 월 11일 안성 공립보통학교, 3월 12일 강화 공립보통학교, 3월 13일 포천 영펑공립학교 학생들 은동맹휴업과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해 갔다. 김포군 양촌면 Ocf곡시장 시위를 주도한 박충서는 3월 1일부터 5일까지 서울의 시위에 참여한 후 향리의 동기들을 규합해 운동을 계획하였다. 안성군 이죽띤의 만세운동도 경성 조선익t학교 학생이었던 이인영이 친척집에 내려와독립선언의 취지를알리는 유인물을 배포히고농민들을 선동해 죽산시장의 시위를 주도하였다. 가평에서는 등사본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밀통댐폐)」 이라는 문서를 제작· 배포하였다. 양주군의 봉선사 스님들은 조선독립단임시사무소 명의로 격 문 200장을 배포하였다. 이러한 사전 조직과 선동작엽을 하는 운동 초기 단계에 지식인·청년· 학생의 역할이 주요했디. 수원군 일형면 하광교리에 거주하던 이종싱t일영 득수. 당시 20세)은 1919년 독립만세시위기- 일 제히 전개되던 3월 말 싱해에 있는 독립운동 인사 치관호와 연락해 서울의 빅성환이 보내오는 r독립신문』을 여교사차인재와힘께 8∼9월 경까지 수원면내의 조선인 집에 배포히는등 독립만 세의 의지를북돋으며 시위를준비하고 계획하였다. 나. ‘독립’을 외치면 독립이 된다 3월 말부터 경기도 각지에서 동시 다발적이고 격렬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농촌의 면· 리 단위로 전개되면서 지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들이 운동을 주도해갔다. 적게는 수백 명 에서 많게는 수천 명이 단일 시위에 침여했다. 저녁에 시작된 시위가 다음날까지 계속 되는 경 우도있었다. 그들은 왜 만세를불렀을까? 시위에 침여했던 대다수 민중들은 ‘독립민세를 부르면 독립이 된 다거나 ‘독립은 천운’이라는 생각을 기지고 있었다. 당시 떠돌아디니던 고종 독살설도 중요한 앞의 책 294쪽 4. 활용을 위한 독립운동의 이해 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