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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에서 여성으로서의 띠풋함보다는 궁은 동지애를 느낄 수 있었다. 폼은 중키에 날씬했고 화장기 없 는볕에 그을린얼굴. 거진손등윤보고는갚은우정괴-함께 -. 나는그녀가고난을겪어온사람이 었고. 실력을 기르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인 것을느꼈다 이런 인연으로 최용신 선생 사후인 1939년 성서조선시 를 이끌고 있던 스승 김교신(1901- 1 945) 선생의 지시로 최용신 선생 전기를 집필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전기의 서문은 김교 신 선생이 적고 있다. 소화 14년(19:39) 12월 15일 인쇄하고 같은 해 12월 18일 발행되었다. 정기는 50전, 저작 겸 발행지는 ‘개성부 고려정 236-4 류달영’, 빌-행소는 ‘성서조선시3라고 되어 있다. 당시 류달영 선생은 학교 졸업 후 개성 호수돈여고 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 는 당시 집필 상황 을 다 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소설 상록수가 발표되자 샘골 주민들은 사랑으 로 잠 못 이룬 인물로 최 선생을 왜곡시킨 데 분격, 반발하였다. 이때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라고 생골 주민들을 직접 설득하기도 했다. 이후 개성 호수돈여고에서 교사로 재직 중 이던 25세 때 스승 인 김교신 선생에게 최용 신 선생의 고귀한 생애를 널r 히고 이 정신과 활동이 정획하게 기록되어 후세에 아주 유익한 자료로 남게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김교신 선생이 “같이 도외주고 활동했으니 사정을 잘 아는자네가 직접 써서 한국 여성시 를 빌 L 혀야한다.”고 해서 최용진 전기를 쓰게 됐다 . 방학 을 이용하여 샘골 미 을‘ 최 선생의 고향인 원산등지를 두루 답사 취재해 전기를완성했다. 당시 이 책을 출판했던 성서조선사는 김교신 선생이 주필로 r성서조선 」을 동인지로 간행 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우찌무라간조 문하인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 유석동, 양인성 선생 등이 함께 하고 있었다. 출판 비용은 전국 각지의 성금 과유영모, 함석헌, 노평구 선생 등의 출금으로 마련했다. 이 책은 그해에만 4판이 발행되는 성괴를 올렸다. 하지만 1942년 r성 서조선 」사건이 터지면서 최용신 전기는불온서적으로 압수돼 불태워지고,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류달영 선생 등 r성서조선펴 출판 관련지는 물론 장기려 박사 같은 독지들까지 모 두 투옥되게 되는등 고초 를 겪게 된다 214 IV. 독립운동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