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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을 집았다. 그는 1919년 4월 조선은 일본으로 독립해야 한다며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비 난하는 문서를 제작해 뿌리디까 서대문 경찰서에 구금되어 고문을 당한 뒤 독립운동을 하 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석방되었다. 이후 조민형 선생은 대대로 농시짓는 일이 힌국인들 이 해야할 일이라는돗을 갖고 농촌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그는 김포에서 농촌운동을 하고 있던 일본인 이와세의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운영방법을 배웠다. 이때 농촌에서 생산되는 물품의 공동판매외- 소비품의 공동구입에 관한 일을 밑아 서 했다. 그러다가 1928년 김포지방 8곳에서 공동경작을 실시하게 되었다 . 여기서 성과를 올리자 곧 “농촌진흥운동은 먼저 정신으로부터 시작해이= 한다,”는 기치를 내건 농촌운동 지침서 r 조선농촌구제책J을 치술히-게 된 것이다 . 최용신 선생은 1928년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스승황애덕 선생을 만 난다. 횡애덕 선생은 3·1운동 당시 대한애국부인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인물이었다. 이후 콜럼비아대 핵 l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협성여자신학교에 부임했다. 여기에 농촌사업지 도학과를 신설하고, 교재로 이 r조선농촌구제책J 를 시용했으며, 교수로 전영택 선생괴-조병 옥, 김창준 선생 등을 초빙했다. 194 IV. 독립운동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