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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리(里) 중 6개 리가 참여했다. 원곡면의 만세시위운동은 3월 25∼26일부터 원곡면내 독립 시위운동이 시작되었다. 3월 28 일부터 3월 29일, 30일, 31일 계속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였고, 31일의 시위 후 해산할 때에 칠곡리 이유석·홍창섭이 ”내일도모이라”고명하였다.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l 일) 칠곡리 등 각 동리에서는 이민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그 후 저녁에 띤민들이 다시 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였다. 이때 위의 주도지들이 동리별로 참여를 독 려했다. 이날 저녁 8시경 등불 또는 햇불을 날팩 들고 원곡면 사무소 앞에 모인 원곡면 각 동리 주민 1,000여 명은 띤장 남길우{1ti吉祐)와 면서기 정종두를 꿀어내어 태극기를 쥐어 주며 민-세를 부 르게 하고, 그들을 앞세워 독립만세를 부르며 양성으로 향했다. 이들이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 계 성은고개에 이르러 이유석 ·홍창섭 ·이덕순·이근수· 최은식·이희룡등이 교대로 일어나서 군중에게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본의 정책을 시행히는 관청은 불필요하기 때문에 우 리들은모두같이 원곡면·양성면 내의 순사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등을파괴하자. 또한 일 본인을 양성으로부터 구축히-자. 제군은 돌 또는 몽퉁이를 지참히여 성히 휠동하라”는뭇의 연설 을했다. 이에시위군중은근처의 니뭇가지를꺾어 몽둥이를준비하였고, 바지에 작은돌을싸 가지고 양성 주재소와 면시-무소, 우편소 등이 있는 양성면 동항리로 나이갔다. 여기에 양성면 민 수백 명이 합류하여 시위대는 2,000여명으로 불어났다. 시위 군중은순사주재소로 나아가주재소에 불을 놓고 전선을 절단했다. 다시 시위대는 양성 우편소를 파괴하고 일장기와문서들을 불태웠다. 그 후 일인 잡회상과 대금업자 집을 습격하고 가구와 기물들을불태웠다. 잉;성면에서의 일제 관공서외- 일인 상점을 파괴 , 빙-회를 끝낸 시위 군중은 그 이튿날인 4월 2 일 새벽에 다시 원곡면으로 넘어와외가천리에 있는원곡면 사무소를불태우고, 아침 식사후에 는 평택의 경부선 철도를 차단할 계획을 하였으며 일본수비대의 진입에 대비하여 원곡리 남산 에 돌무더기를쌓았다. 그러다 일본수비대 진입 소식을듣고 모두 피신하였다. 이 시기 수원군의 남양반도 사강, 조싼·우정면에 일제순사가 각각 1명씩 시위대에 격살되었 고그곳과 양성 주재소가 시위대에 의해 전소되었다. 3. 경기도 3 1운동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