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page

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길-산면 사무소로 쳐들어가 면장 김친-제(암,폈펀), 면서기 서병일(徐 內-)을 비깥으로 끌어내어 같이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였다. 이용준은 경성복심법원은 원심판결보다 더 높은 3년 형을 받았다. 3월 29일 강상면 송흐L리의 신석영(샘.水)은 갈산면 양근리 장에 가려고 교평리 도선징F에 나 갔다가장이 폐쇄되어 도선징에 모여있던 100여 명의 사람들과힘쩨 태극기를흔들며 독립만세 시위운동을벌였다. 3월 30일 용문띤 굉틴-리에서 미룡리의 조영호(젠짜체), 오촌리 김윤구(암쉐;}()와 신순근(띔‘;쐐) 등이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조영호는 “일본인은 모두 귀국하 라. 1개의 계란이라도 쌍계(쌍동의 뭇)면 2마리의 병아리가 나오는 것이니‘ 1국으로 함은 쉽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띤설하며 군중들을 고무했다. 3월 31일 강하면 사무소 앞에서 68세 된 최대현(센太짚)이 주도하여 300여 명의 동리민이 태 극기를흔들며 독립만세를불렀다. 디음날인 3월 30일 오전 4시 양서띤 도곡리 노십배서 1천여 명의 주민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1일에도 양서면에서는 2,000명의 군중이 헌병주재소 앞으로 나아가 조선독립만세 를 연창하면서 독립의 의시를 표명하였다. 이튿날인 4월 2일에도 1,000여 명의 시위군중이 양 서면 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3일에는 고읍면에서는 전날 강하면 만세시위를주도했던 구힌국 군인출신 의병이었던 최 대현등이 서울에서 옴학생 2맹 등의 주도로강상-강하·양서·고읍 4면주민 약 4천 명이 고읍 면에 모였다. 최대현은 군중 잎에 니-서 “읍내로 가려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며 군중을 이꿀 고 앞장서서 나이갔다. 이들이 고읍떤 옹암리(갚감믿)와용암리(폐끼믿) λ}ol의 작은 언덕에서 일 본 헌병대에 저지를 받。f 최대현은 체포되고 해산되었다. 이날 지제면 곡수리에서도 민세시위가 일어났다. 지제면 곡수리 시위나 고읍면 시위는 일제 자료에 보이는 4월 3일 갈신면 양근리 4,000명 시위로 귀결된 것 이닌가 생각된다. 3. 경기도 3·1운동 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