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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꿀고선주지리(f山住삐믿) 이경응의 집을파괴하였다. (11) 0d탱지역 .3 · l운동 잉=평군의 3·1운동은 3월 10일 서종면 문호리에서 수백 명의 민-세시위가 일어났다. 그후 3월 23-24일경부티 4월까지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3월 23일 청운면 용두리 장날을 기해 단월면 덕수리 신재원(I"ll在元)과 부안리 김종학f金짧템 등 천도교인들이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광목에 “조선독립기(朝빡꽤立야)”이라고 쓴 깃발 3개를 만 들고 시장 안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선도했다. 이에 200여 명의 장문들이 호응하여 독 립만세를부르며 시가를 행진했다. 3월 24일에는 갈산면의 연희전문학교 서기인 이진규(수값珪)기- 독립선언서 수십 매와 대한독 립회k파찌立섞) 명의로 된 격문 수십 매를 가지고 3월 23일 서울을 출발히여 양평으로 왔다. 대 한독립회 격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전략) 나라 없는 노예가 되어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총’칼 밑에서 죽 는 것만 못하다. 독립의 시기는 왔다. (중략) 우리 동포여! 이 시기를 잃지 말고 독립기를 번득이고 맹렬히 분71하여 독립하라|” 3월 24일 길-산면 OJ-근리에서 열린 장날에 이진규는 1천 여 군중들에게 “조선민족은 이 기회 를 타서 일본 제국의 굴레를 벗어나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고 독립선언 서와 위의 격문을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군중들은 이진규와 함께 독립만세 를 절규하며 시장 안을 행진하였다. 양평헌병분견소 헌병이 출동하여 이진규와 앞장서 이꿀었던 곽영준을 구금하자 군중들은 헌 병분견소로 모여가 석방을 요구했다. 수백 명의 군중은 갈산면사무소, 양평군청, 양평우편소 등에 처들어가 서류, 장부 일부를 훼기하고 면장 김찬제(숨縣찍)를 끌어 내 구타하였으며, 숨은 군수를수색했다. 한편 갈산면 공흥리 이용준(李째쫓‘ 딩- 37서1)은 이와 별도로 400여 명의 군중을 이꿀고 OJ-근리 78 II . 경기도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