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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는 홍영학교(與英젠校)에 들어와 시위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자 여학생들이 이에 호응하여 학교를 나서 대열을 지어 독립만 세를 부르며 마 포방띤으로 진출했다. 나 흘 뒤인 3월 9일 동쪽 의 한지띤 상왕십리에서 300염의 주민들이 왕십리 보통학교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고, 연희면 수색에서도 수백 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이후 약 2주간의 소강상태 후 3월 23일 상왕십리 시위를 시작으 로 3월 28일까지 하루도 빠짐 없이 거센항일독립운동이 일어났다. 3월 23일부터는한지면의 왕십리. 용강면의 공덕리, 동막 리. 당인리, 연희면의 합정리. 수색리. 창전리, 은평면의 신사리, 역촌리, 녹번현. 숭인띤의 돈 암리, 신도띤의 구파발리 등지에서 50명에서 1,000명에 이르는 다양한 규모의 시위가 벌어 졌다 . 3월 24일 녹번리에서는 200여 명 시위대가 시위에서 검거된 주동자 7명을 구출하그 l 자 헌병주 재소 를 습격하였다 . 그러나 헌병의 병력이 보강되어 시위대는 뭇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24명이 추가로 검거되고 말았다. 같은 날 지도면 행주리(幸 써‘1110 주민 800여 명과 신도띤 능내리O 맞內 11[) 주민 500명은 만세를 불렀고, 중면 일산리( ·111민 ) 시정 에서도 500여 명이 야것앤l 면사무소 앞 에서 독립만 세를 고창 하고 일인 가옥 에 투석히는등 격렬한항일투 쟁을 전개하다가 15명이 체포되었다. 25일 밤 송포면 덕이리(채lf1P.) 주민 200명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 26일 밤 9시 경 묵섬에서는주민 2,000여 명이 면사무소를 습격히여 면서기를 구타한 후 면장집으로 몰려가 투석하였으며 대다 수 노동자로 구성된 시위대 300명은 헌병주재소를 포위하고 만세시위를 하 였다. 헌병대측과 교섭히여 해산하려던 시위군중을 향해 증원부대가 무차별 발포히여 사망 1명 과 부장 12명이 발생하고 103명을 체포히-였다. 시위 주동자 12명에는 마치문· 소달구지꾼· 짐 치문등노동자들이 다수였다.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점차농민노동자등기층사회로확대해 가 고 있었던 것을 나타내 주었다. 이외 26일과 27일 밤 벽제띤 대자리(太慧里) -관산리(피·111 1H)에서도 횟불시위가 있었다. 27일 숭인면 청량리 부근에서 500명 돈암리에서 50명 군중의 시위를 비롯한 신도면 진관리(i jt파뽀) 시위로 이어졌다. 송포면 대회리 주민 150여 명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하다가 30여 명이나 일제 헌병에게 피체되었다. 28일에 중면 내 여러 지역에서 100∼150명 시위대는 햇불을 들고 74 II . 경기도 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