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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일본헌병은 시위군중을 향해 무차별 빌-포를 하여 앞장서 시위를 이끌던 이달용 등 4명이 현 징 L 에서 사밍하고 이제혁 등7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김필규 등은옥중에서 순국하였다. 3월 24일 진접띤 금곡리에서 청년 13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힌 - 일이 있았으 며, 3월 29일에는 400여 명이 시위하자 일본헌병이 빌-포하여 1명이 사밍하고 3멍이 부상딩-하 였다. 진접면 봉선시{싸先ι)의 승려인 이순재(1i:핑,|&) ·김성숙 (싼렌 l't 이냉 성임) ·깅-완수(강〉‘ L싸)는 ‘조 선독립딘 - 임시사무소 ’명의로 “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7H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하였 다. 조선도 이 기회에 극력운동을 하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내용의 문건을 약 200매 정도 인쇄하여 부펑리, 진벨리 등 부근 4개 동리 민기에 배포히-였다. 이 격문에 호응히여 3월 31일 광릉천변에 600여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 헌벙이 출 동히여 해신-했다 . 3월 26일 이담띤(jJ텐1(1j) 동두천(빙l씨Ii) 시장의 장날을 맞아 배재고보 정원이(째b띠Jf) 등이 중 심이 되어 동두천 정에 lO여 개의 미을 주민 1,300여 명이 집결히-였다. 시위대는 면장 신공우( 1 j1 公써)에게 선안서에 서맹케 하고시위대열에 앞장세워 이래장거리 동두천역 앞등지를돌며 시 위를 계속히-였다 . 기마 헌병이 칼을 빼고 저지하려 하자, 박경필CHI강씨) ·고복돌(끼‘폐 l낀)이 말의 다리를몽둥이로후려쳐 쓰리뜨렸다. 주도자 7명이 체포되었다. 이처럼 지방의 시위운동은 면장을 첨병으로 한 일제의 수직적 지방통치 구조와 구장을 정점 으로 한한국 민중의 수펑적 공동체 진영 시아에 대립전선이었다. 3월 히순부터 구장들이 니-서 주민들의 의사 를 결집시켜 시위운동 을 조직회히는 시위가 백석 면에서 일어났다. 3월 27일 백석면(「!1i뼈) 연곡리(파?}믿) 구장 안종규 {'/,‘; 종태(安*이台‘ 37세])가 시위를 주도하였다. 안종태는 “조선은 일본에게서 독립할 수 있다고 고취 하며 이민들과함께 시위를벌였고, 이들은 28일에도주민 600여 명과함께 오산리(싸|||||!) 대들 벌에서 시위한후 백석띤사무소까지 민-세시위를 계속하였다. 3월 27일 구리띤(JL'I' 씨) 상봉리(上싸l낀)에서 주민 30여 명이 민세시위를 벌였고, 28일 오후 5 시경에는 아천리(뼈川 'It)의 띤서기 이깅덕(1lU德. 28세) 과 심점봉 6 때l;Jioi, 27세)이 주도하는 기운데 이민수십 명이 이웃한토평리(UF!!J외-교내리(템|λJ '!!.)를 돌면서 민-세시위를계속하였으며, 29 일에는 아천리의 아치얘H뼈fi!i,' i山) 꼭대기까지 올라가 태극기를 들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68 II . 경기도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