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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4일에도 전날의 두 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민 약 600명이 합세하여 만세시위를 벌였 으며. 밤에는 2,000여 명으로 불어나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도 하였다. 개성의 싱점들은 3월 27일부터 폐점하고 철시에 들어갔다, 일본인 싱점들이 문을 열어도 개 성 시람들은 일본인 상점을 이용하지 않았다. 일본인 상점들도 히는 수 없이 문을 닫지 않을 수 。}。}「L w. λλI 진봉면에서는 3월 26일 진본면 지금리의 이재록 (칩£따)의 주도로 만세시위를 했다. 대조족리 에서는 3월 28일 동리민들이 오관산에 올라햇불을들고독립만세를높이 부른데 이어 29일, 30 일 연속 산상 햇불시위를 벌였다. 그 후 신에서 내려와 면장에게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 고 일장기를 불태웠다. 이들은 3월 31일 빔써l도 햇불시위를 벌였는데 인근 백전리. 진봉면 탄 동리 주민들도 죠썩히-였다. 광덕변에서는 3월 31일 사분리와 황강리 고천리 중연리 등지에서 수 백명이 만세시위를 벌 였다. 중면에서는 3월 26일 창내리 앞산에서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대롱리에서는 3월 31 일부터 4월 2일끼-지 뒷산에 태극기를꽂이놓고밤마다봉화를올리며 시위기- 계속되었다. 싱-도변에서는 3월 29일 300여 땅의 시위군중이 상도리에서 풍덕리에 있는 일제 개성헌병 분 견소로 니어가 건물을 애워씨고 시위를 벌이며 전선을 끊고 전신주를 넘어뜨리고지- 하다 일제 의총격을받았다 중서면의 곡령리에서는 4월 1일 수십명의 청년들이 망치와 곤봉 등으로 방어를 위한 준비를 했 다. 이들은 일전불사의 각오로 니-Or 가 복본정 당교 (*橋) 앞에서 일본 경찰과 충돌하였다. 이 들은 총칼에 맞서 돌을 던지띠 일본 경찰들과 격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결국 주도자 17명이 체 포되고해산되었다. 영북면에서는 길수리 주민들의 주도로 4월 1일부터 4월 6일까지 여러치례 시위가 있었다. 홍 교면에서는 4월 6일 사곡리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일제 관헌의 발포로 부 상자가발생했 다. 이와 같이 개성에서는 3월 3일 민-세시위가 시작되어 중간에 침묵기가 있었으나 3월 히순에 들어 다시 활빌히-게 각지에서 시위운동이 일어나 4월 초까지 시기행진에서 산상 햇불시위, 헌 3. 경기도 3· 1운동 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