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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서거 소식이 알려지자 덕수궁 앞으로 애도의 인파가몰려들기 시작하였다. 3월 3일이 국장일로 결정되자, 2월 히순부터 황제의 국장을 참관하기 위해 지빛에서 상경히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광무황제의 서거는 밍댁의 비애와 함께 일제에 대한 공보 (公ll't)의 공감대(씨반싸)기 ­ 형성되어 민중시위운동을 뒷받침하게 했던 것이다 . 2) 경기지역 3 ·1운동의 전개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동로 인시동의 태회관에서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이 있었다. 비 슷한 시각 탑골공원에서는 시민 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 낭독을 통해 독립을 선포하고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대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시민들이 합세했고. 함께 만세를 불렀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던 최은희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독일 영사관 11서 회정하여 의주통을 지나갈 적에는 길7에 냉수동이가 즐비하게 놓이고, 평 양수건을 쓴 할머니들이 지켜 서서 바 가지로 물을 떠 주디-기- 비-기-지째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 를부르던 것이 펙 인싱적이었다.” 일제 총독부는 서울 중심가의 군경을 총동원하는 한편 용잔의 일본군 보병 3개 중대와 기마 병 1개 소대를 시위해산에 투입하여 134명을 검속했다. 서울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시작된 같은날에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에서도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이들 지역에는 사전에 천도교 측 과 기독교 측에 「독립선언서」 가 배포되었고, 준비 직업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일제 딩국은 물론, 민족대표나 운동에 참여한 누구도 이 독립만세 시위운동 이 어디까지 퍼져 나갈지 알지 못했다. 3월 5일 남대문 역에서 학생단이 주도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은 후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되다 3월 둘째주부 터는 그나마산발적인 시위조차도 잠잠했다. 그러나 이 잠복기는 지방민들의 머리 와 기슴에 “일제에 노예로 살수 없다”는 확고한 애국심과 독립정신에 불을 지피는 기간어었다. 3. 경기도 3· 1운동 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