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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의회설립운동의 좌절 임오군란, 갑신정변으로 니라가 요동쳤다. 동학농민운동에 또 힌번 요동치는 것을 넘어 청일 전쟁으로 비회-되어 동아시아기- 요동쳤다. 조정에는 친청파,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등으로 갈 라져 국가보다 자신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국정 표류가 계속되었다. 게다가 아관파천(바체‘將펴) 으로 국가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이에 1896년 7월 20일 독립협회가 창립되었다. 독립협 회는 독립문 독립공원 독립관 건립을 통해 자주의식을 드높이고, 토론회, 강연회 · 기관잡지와 r독립신문J을통하여 국민들에게 근대적 자주독립사상과 민주 공화사싱을 포함한지유민권사상 과지주적 근대화사상을 널리 보급하였다. 아관파천으로 러시아는 자신들이 조선 국왕과 정부를 보호하게 되지- 절영도 조차, 한러은행 설치 등이권을요구했다. 그러자미국·일본·독일·프랑스·영국 등도 뒤질새라광산-철도 전 신·삼림-어장등각종의 이권을요구했다. 이에 독립운동이 1898년 1월부터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요구 반대 한러은행 설치 반대 등 주 권과 국가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며 정치운동을 시작했다. 독립협회기- 여론을 환기시키며 여 론을 등에 업고 정치적 문제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지- 열강들도 이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탐욕적으로 조선의 이권을 확보하려던 러시아가 한빌- 물러섰다. 조선 정부에 영향력 을 키워 왔던 일본 또한 아관파천으로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이로부터 향후 7년간 러 일 등 외 세를 한반도에서 후퇴시켜 수년간 세력균형을 이루게 했으며, 개회독립사상과 민주주의사장 및 공회주의시상을 널리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불안한 시국과흔들리는 주권 신뢰할수 없는 위정지들에 대한국민들의 불만은 만민공 동회라는 형태로 참정욕구를 분출시켰다. 처음 독립협회가 주관했으 나 일단 한 번 만민공동회 는가 열리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큰 집회가 이루어졌다. 만민공동회는 정치개혁의 일환 으로 의회설립운동으로 나아갔다. 1인 전제정치의 폐단을 보완하기 위해 황제의 자문기구인 중 추원을 의회로 개조하자는 것이었다. 권한 익화를 두려워한 황제는 의회설립을 반대했다. 고 종황제는 근대회를 추구하되 서양의 절대주의 황제들과 같이 황제가 중심이 되어 추진하고자 했다. 만민공동회의 의회설립운동은 황제와 측근대신들의 주저와 빙F해로 말미잎에- 1898년 11 월 5일부터 12월 23일까지 고종친유 이후의 6일간을 휴지기를 제외하고 42일간이나 계속되었 52 11. 경기도 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