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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처형되었다. 이강년은 양주군 건천면에서 원주방면으로 진출하다 1908년 6월 4일 청풍 까 치성 전투에서 토벌군에게 사로잡혀 9월 19일(음력) 서울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민긍호는 1908년 2월 29일 치익산 등자치(登까1t)이래 궐덕리(做암'f!.)에서 숙영하다 일제 순사 대에 포위 공격을 당하여 20명이 전사하고, 민긍호도 체포되고 말았다. 그날 밤 민긍호의 좌우 군 (左右軍) 50∼60명이 민긍호를 구출하려 하자 일제 순시-대는 민긍호를 사잘했다. 이와 같이 하여 1907년 밀에서 1908년 초 양주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13도창의대진소 연합의 병의 서울진공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작전은 연합의병부대가 우세한 화력과 기동력을 가 진 일본군과 정면대결을 선택한 것으로, 의도는 야심차고 좋았으나 전력상 처음부터 어려움이 있었다. 이후 의병투쟁은 대대적인 의병탄압에 직면하게 되었고, 의병투쟁은 다소 믿힘되었으며, 경 기지역 의병은남부의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경기 서북부지역과입진강, 힌탄강유역으로집결 히케 되었다. 또한 의병부대들은 이전보다 소규모화 되고 산악 등지에 은신히-며 수시로 출몰히­ 는게릴라벙-식으로전개되었다. (:J) 관동창의원수부 허위는 서울진공작전 때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서 기습을 받아 패퇴한 후 적성군 김악산폐따 山)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 후 중남부지역에 집중된 의병탄압을 피해 밀려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으로 근거지를옮기고 휘히에 조인환, 권준, 황회종. 김수민, 이은찬등의 의병장을 거느리 며 유격전을 벌였다. 이은찬도 1908년 3월 이래 양주와 포천 시아를 오가며 임진강 유역에서 의 병부대들의 연합을 모색했다. 이러한 노력들이 합쳐져서 연합의병부대로서 관동창의원수부가 조직되었다. 원수부 총대징은 허위(또는 김수민) 중군장 이은찬싼냈贊), 우군장 윤인순(Ji·仁핑), 좌 군장 정용대(정용대), 선봉장 김교성(金敎盛) 등으로 지휘부를 구성하고 부하가 많을 때는 2.500 명에 달하기도 했다. 각 대장들은 주로 독자적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하면서 1908년 11월부터는 2∼3개 부대가 연합하여 일본군을 기습히는 전술을 구사했다. 각 부대의 활동을 보면 디음과 같다. 48 II . 경기도 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