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λ에에 “의벙들 이 서울로 쳐들어온다.” “의병 결사 대 30명이 서울 에 잠입뼈 각 대신들을 살해 하려 한디끼는 풍설이 돌았다. 일본군은 한편으로는 동대문 밖에 기관포를 설치하고 헌병과 순 시를 동원하여 각 대신의 집과 시내 요소요소에 경계를 엄중하게 펼치며 연합의진의 불 의의 공 격에대비했다. 다른 한편으로 연합의진 선발대가후속부대를 기다리며 주춤하고 있는 사이에 일본군이 선발 대를 기습했다. 김규식과연기우가탄흰에 맞아쓰러지고부대는흩어져 퇴각하고밀았 다. 바로 그때 후위군인 이강년 부대 1800명은 춘천 가평에서 출발하여 양주군 왕발산 아래 산안 촌 (111잦村)에 와서 일본군 100명과 교전 중이었다. 원주의 민긍호 부대는 이강년부대를 지원하 기 위해 진군 중이었고, 가평 등지의 2000명이 포천 백운산 의병괴- 협류히 -여 양주의벙의 후군 이될예정이었다. 민긍호 의병부대는 해산군인 250명을 포함한 약 400명의 규모와 1.200정의 소총, 약 4만발의 틴-흰을 확보하고 있었으니- 강원도와 경기도 충북을 무대로 거의 독지적으로 활동히는 수십 개 의 소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강원도에만 32개 소부대가 있었다. 1908년 1월경 경기도 양주로 집결하기 위해 강원도 각 면장 이징에게 20∼50세 장정을 소집하여 10일의 잉;식을 각자 가지고 서울 동 대문 밖 10리 되는 지점에 집힘-시키도 록 히는 격문을 띄웠다. 이 시기 민긍호 휘하의 의 병부대들은 평창·영월· 횡성 홍천 OJ- 구 춘천·인제·장호원 등지에서 혈전을 벌이고 있었고 OJ- 구 부근 임딩당시 f,li)에서는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받아 70여명이 사살되고 200여 명이 부상 당히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사정 때문에 민긍호 의병부대도 서울진공작전에 전력을 투입 할수없었다 . 이렇게 선발대가 무너지고 후속부대 연락과통제가 어려워진데다가 각지에서 일본군을 상대 히느라 정홍 l 이 없는 상횡에서 1908년 1월 28일(양력) 이인영은 문경의 부친 사망소식을 듣 게 되 었다. 존경받는 유학자로서 효 (쑤)를 생명처럼 중시히는 이인영은 장례를 치르기 위해 뒷일을 허위에게 맡기고 문경으로 돌아가면서 의병을중지하도록 각 진영에 통문을돌렸다 . 13도 연합의진의 서울진공작전 실패 후 일제에 의해 의병진영 지도지들은 끈질긴 추적과 처 형을 당했다. 이인영은 문경에서 3년 상을 치른후 일본군을 피해 황긴-등지로 옮겨다니며 몸을 숨기다 가 1909년 6월 7일 황간군 금계동 {金?찢페)에서 일본군 헌병에 붙잡혀 9월 20일 경성감옥 2. 경기도 국권회복운동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