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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죽산등과 늠%면 f 과 아산만에 위치한 난지도와 덕적군도 등 도서지역에 거점을 마련히여 의병활동을활벌하다가 체포 되어 종신유형에 처해졌다. 중 기차게 계속되는 경기 남동부 지역 의병투쟁에 일제는 초토화로 맞섰다. 1907년 10월 OJ'-근 읍 내에서 30리 거리에 있는 8개 마을 1,000여 호에 불을 질러 초토화했으며, 여주, 이천, 안성, 지평 등 의병 활동 흔적이 있는 곳은 어디든 불을 질렀다. 그 괴정에서 여주 신록사, 수원 용주 사등유서갚은 사 찰이 불 에 타갯더미가되었다 . 마. 임진강 유역 및 경기 서북부 지역 의병전쟁 임진강 유역 및 경기 서북부 지역 의병투쟁은 1907년 8월 9일 강화 분견대 해산군인들이 토 벌대를 피해 교하, 통진 고양 김포 부평 등지로 진출하면서 활기를 띠었다. 의병 부대들은 수 십명에서 100여 맹 단위로 고양순사분파소(흡|陽 ;filjt分패파)나 헌병분견소를 습격하고. 일본 순 사 , 우편호위병을 공격하고 통신선을 절단했다. 이러힌- 양상의 의병활동은 1908년 들어 더욱 강화되었다. 연기우 ((延필쩌. 다쩌. 이냉 과宇‘ 샤바‘ 奉씌) 는 경기 강원 황해 3도가 만나는 삭녕 또는 적성 출 신의 선비로 수원에 본부를 둔 제1진위보병대대 소속 강화진위대 부교(;,\IJ校)였던 해산군인이었 다 . 8월 2일, 강화진위대의 전 대대장이자 당시 보창학교(?깐씬 l校) 교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었 던 이동휘(10끼폐)와 강화진위대 지홍윤 씨•JL允 ) 김동수 (金싸秀) 전 참교 유명규 (청ljl써소) 등 전 ·현 직 강화진위대 부사관급 이상의 장병들이 전등시에서 무장몽기 준비를 의논하였다. 강화헌병 대는 8월 11일로 예정된 해산식을 9일 오후로 앞당겨 거행했다 . 연기우는 울분을 토했다. 해산 군인과 주민 수 백 명이 무기고를 열어 무장하고 진압을 위해 출동한 수원진위대와 강화읍 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일제가 거듭 증원 군 을 파견하자 강화도 의병들은 둘로 갈라졌다. 그 중 지홍윤 의병부대는 해서(海떠) 쪽으로 갔 다. 연기우는 장 단으로 가서 40여명의 의병을 이꿀고 장단군 덕물포에서 대한창의존OJ'- 군(太꾀ii\ 4월때겠떤) 을 표 빙 P하며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 그는 엄정한 군율로써 의진을 이꿀며 임진강 유 역에서 활동 중인 허위 김규식 등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13도창의대진소의 일원으로 서울진 공작전에도참가히였다.그후에도연기우는주로경기도포천,삭녕-철원·연천-마전·장단·적 42 II . 경기도 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