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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군인 들이 의병에 죠썩할 때 서울시위대와 원주 진위대에서 각 1.000여 정의 양총과 탄환 을 . 강화분견대에서 600여 정의 양총과 탄환을 의병진영에 제공했다. 구한국 정규군이 참여한 데다, 성능 좋은 정규군의 잉;총을 확보하자 의병의 전투력은 크게 향싱되었다. 라. 경기 남동부 지역 의병전쟁 1907년 7월 20일 광무(고종)황제의 강제 양위 소식이 들려오자 7월 21일 안성청년회장 강태현 (£茶鉉)은 결사회를 조직하고 일진회 지회와 회장 집 궁내부 대신 별장을 습격히여 불태웠다 . 이 사건을 계기로 7월 히순 용인. 진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여기에 군 대해산후 서울 시위대와 원주진위대 해산군인들이 의병부대에 합류하면서 경기 남 동부 Ocf 근. 지평. 이천. 여주 죽산 음죽. 안정 양지 용인 등지에서 의병 투쟁이 확산되었다 . 이중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의병부대를살펴보면 디음과 같다 . I) 양근방연 Ocf 근 출신 조인환은 지펑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400∼500명의 대부대를 형성하였다. 또한 양 근의 소장수 출신 의병장 권득수와 함께 용문산의 상원시- 와 용문사를 근거지심아 %뇨근세무서, 지평군아, 고랑진(샤泌It) 나루등을습격하였다. 일제는 보병 제52연대를 동원뼈 탄〈빼 왔으나. 매복 척후 포위 격퇴 등으로 맞섰다. 이에 일제 군경은 Ocf 근 징수동 {l~’’; 의 군량과군수물지를불태웠다. 또한 %판읍내 민가수백 호와 지평 용문동페!”Jil11])의 기독교인 기옥 14호, 평민 가옥6호에 불을놓아소각하였다. 조인환은 400여 의병을 이꿀고 1907년 9월 17일 Ocf 근 분원동{分|파!11J) 남쪽 고지에서 광주 수 비대 보병 47연대 1소대와 1시간 30분 동안 격전 끝에 부히- 20여 명을 잃고 흩어졌다. 이후 조 인환 대신 퇴역병 신창현(「11,'11鉉)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 신창현은 9월 24일 200∼300명의 의병을 이꿀고 Ocf 근 서북 10리 지점인 사탄 〈沙澈)의 일본군 보병 51연대 1소대 숙영지를습격히는등활동하다증원군 과합세한그부대의 심면공격을받 아 부하 27명을 잃는 타격을 입었다. 그 후 신창현은 300여 부대원을 이끌고 10월경 강원도 인 40 II. 경기도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