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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 장벙들이 무기를 들고 일본군에 대항하여 시가전을 벌였 다. 일본군은 카지와 리-WOJ;O 대위 를 비롯한 40여 명의 시상자가 났고 한국군은 장교 13명을 포함한 57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 이 부상딩하였다. 또한 성내외 민가 수백호가 불에 탔으며 해산군인을 지휘하던 남상덕도 장 렬히 전사하였다. 지휘관을 잃고 탄약이 떨어진 해산군인들은흩어졌다. 전투가 벌어지자 시내 병원의 간호시들이 탄흰을 뚫고 쓰러진 힌국군 병시들을 돌보있다. 연 동여학교 (파퍼女젠값) 학생들은 제중원(팎빨院) 으로 달려가 부상한 장졸들을 간호하였다 . 실F 아남 은군인들은 서울을 빠져 나기- 의병대열에 합류하였다. 군대 해산조치가 있자 지방 부대였던 강원도 원주진위대 특무 장교 민긍호(I꾀rr해)는 전부원 250명을 지도하여 무기고에서 1,200정의 소총과 약 4만발의 탄환을 확보한 후 강원도와 경기 도, 충북을 무대로 일본군과 맞서 싸우며 관동의병(關束옳JU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7월 30일 전 강화진위대장이자 보창학교 교장으로서 대한자강회 강화지회장을 겸히고 있던 이동휘(깎싸띠가 강회군민을 모아놓고 일본을 규탄하는 격렬한 연설을 하였다. 디음날 군대 해 산 소식이 들려왔다. 강회진위대 하사 유명규(劉|꺼£) · 연기우(延필%) ·부교(!1\IJ校) 지홍윤씨μ允) 등은 강화의 자강회(「l꽤짝) 회원들과 일본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순사를 사실하고 친일 군수이지- 악명 높은 일진회 총무인 정경수(쨌꽃*)를 총살하였다. 일제는 기관총 2문과 보병 1개 소대를 강빽 급파하였다. 8월 10일 일본군의 공격을 예상한 강화진위대 장병들은장령띤(삭체面) 갑곳동(며밟페)에 매복히여 있디 카 일본군이 강화도에 상륙 하자 기습사격을 가해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그 후 일본군의 반격으로 성안으로 물러난 시위대 는밤새 일본군과격렬한총격전을전개하며 강회성을지켰다. 8월 11일 일본군의 집중적인 기 관총 공격으로 방어선이 무너졌다. 그날 오후 2개 중대로 증원된 일본군 토벌대가 강화도를 장 책 }였다. 이들은 일진회원들 동원하여 가담자를 수색하고 탈출하려는 군인들을 붙집아 처형 하였다. 체포를 피한 군인들은 강화도를 빠져나갔다. 지홍윤이 이끄는 일단의 장병틀은 황해도에 들 어가 북방 의병의 선구가 되었다. 연기우가 이끄는 일단은 장단으로, 나머지는 강화군과 남양 군 연안 섬들에 숨어들었다. 통진으로 빠져나가 무기를 조딜하려던 유명규는 9월 8일 체포되어 총살딩했다. 2. 경기도 국권회복운동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