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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세웠다. 일본군은 남한산성의 의병진을 공략할 방법이 없어 다만 포위하여 보급을 치-단하고 있는데 님한산성안의 식량이 떨어져갔다. 의벙 지도지들 시아에 해산과 항전계속을 놓고 심각한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 식량 부족과 내부 분열로 사기가 떨어진 성안의 의병들 중 탈주히는 자가 속 출했다. 3월 14일 관군은 중군장 김귀성(鋼性)과 후군장 박준영을 붙집아 회유히여 성안 싱황을 파 익하는 데 성공했다. 3월 21일 밤 이들이 병사들에게 술을 먹여 경계를 풀게 힌 디음 3월 22일 새벽 2시 500명의 관군 선발대가 산성의 서문을 통해 침입하여 산 정싱에서 아래로 내쳐 일제 히공격을가했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치열한전투가날이앨 때까지 계속되었다. 시체가쌓 이고 피가 내를 이루었다. 의병 사망자가 500명이고 관군측 사망자도 300명에 이르렀다. 포위 망을 뚫고 의병진이 양근방띤으로 퇴각히는데 벙시는 400명에 불과했다. 4시 빈-경에 남한산성 은토벌군손에 떨어졌다. 김하락등은박준영 3부지를처단한후산성을탈출하였다. 마. 남한산성 때전 이후 남행(南行) 남한산성 패전 후 의병들은두 갈레로 니-누어졌다. 하나는 김히락 구연영을중심으로 영남으 로 이동히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일시 잠적했다가 5월 경에 이천, 광주를 중심으로 다시 일어나 는것이었다. 1896년 4월 9일 김하락 구띤영을 중심 이천의병 일부는 제천의 유인석 의병진을 향해 출발하 여 4월 12일 도착히-여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유인석 휘하 안승우와 띤합하여 충주 장현(짜빠)에 서 관군을 맞아 물리쳤다. 이천의병은 유인석의 잔류요청을 믿는냈으나 당초 영남지방으로 가서 활동하그1자 하였으므로 제천을 떠나 서상렬 의병진과 진영을 합쳐서 안동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김하락과 서상렬은 경북 달성 공격을 앞두고 의견이 갈렸다. 김하락 의병장은공격 강 행을, 서싱렬 의벙장은 병력 부족을 이유로 공격중단을주장했다. 결국 두 시람은 결별했다. 이 천의진의 김태원은 서상렬 의진에 님아 서북행을 택했다. 김하락은 의성으로 이동하여 독자활 동에 들어갔다. 김하락 의진은 이리하여 그해 5월부터 7월에 이르기까지 디음과 같이 관군과 일본군을상대하여 싸웠다. 2. 경기도 국권회복운동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