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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이 의병진은 흩어져 목숨을 보전하기로 하고, 일부는 본진으로 철수히고, 나머지는 시빙-으로 피신했다. 일본군은이현마을에들어가불을질러동리를초토화시켰다. 라. 남한산성 연합의진과 서울진공작전 계획 이현전투의 패배로 이천수창의소는 크게 타격을 입었다. 김하락은 진영을 재정비했다. 그는 우선 2월 24일 여주의 심상희 병사 500명을 지원받았다. 또한 사빙벼l 흩어졌던 구연영, 신용희 전귀석, 김태원 민승천을 다시 불러 모으고, 약 2천 명의 병사들을 새로 모집했다. 창의대조에 민승천을 다시 추대하고, 심상희를 여주대징벼l 세웠다. 또한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박주영으로 대장으로심았다. 1896년 2월 22일 남한산성을 점령한 굉주의 심진원(泡따元) 의병진으로부터 이튿날 세 차례나 긴급 지원요청이 왔다. 침령 장기렴(張파짜) 부대 800명이 성을 포위히-여 호빡 위기에 있디는 것 이었다. 이에 박주영이 이천의병 수천 명을 이꿀고 가서 크게 씨워 물리치고 2월 27일 남한산성 으로 들어가 구했다. 이리히여 남한산성에는 심진원의 굉주의진 박주영(↑|、j,’a 싸, 박준영)의 이천 의진이 합류했고, 이석용퓨않츄)의 OJ=-근의진도 여기에 합류하여 1600명의 의병을 가진 연합의 진이 되었다. 남한산성은 가파른 자연지형을 이용한 둘레 8km의 견고한 돌성으로 되어 있는 요새지였다 대완기, 불랑기 등 포도 수십 문이 있었고, 소총과 탄환은 1년을 버틸 수 있게 쌓여 있었다. 다 만 식량은 100석 내외에 지나지 않았다. 당황한 일제는 친일대신들을 협빅념배 관군 500명을 동원하여 남힌산성을 포위하였다. 1896 년 3월 5일 대포 2문으로 무장한 친위대 30여 명이 남한산성의 연합의진을 공격했다. 그러나 의 진은 이를 잘 믹아내었다. 그러자 친위대 병력에 강화도 병력 200명을증파하였고, 일본군도 주 둔하며지원했다. 이때 의병진영에서는 안성, 펑택과충청도 온양, 장원, 목천 등지의 의병부대들이 연합히여 1 차로 수원을 점령하고, 2차로 남한산성 의병진과 춘천 600명, 분원 1200명, 공주와 청주 600명 및 수원 의병진이 연합히여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관군과 일본군을 협공히여 격파하고, 3 차로 삼남지방 의병과 연합히여 서울의 일본군을 몰아내고 고종을 환궁시킨다는 서울진공계획 32 II . 경기도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