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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의벙진 조직에 칙수히였다. 우선 구연영은 잘 아는 이천군 화포군(서떼() 도영정얘|폐삭) 방춘식(Jj째Ii) 휘하 포군 100여 명을 얻었다. 구연영은 OJ근괴- 지평에서 300맹을, 조성학은 광 주산성으로가서 별패진(밍JI썩'l"li.)1 포군 300여명, 김태원은안성으로기-서 이미 의병을조직해 있 던 민승천(패/휴天) 부대를 얻었으며 신용희는 음축, 죽산으로 가서 화포군 300여 명을 확보하여 1000여 맹의 관포수기- 침어하여 이천수창의소씨川首엽義所)를 조직했다. 지휘본부는 김하락이 있는 이현(셋째에 두었다. 이천수창의소 조직 소식이 전해지자 용인. 안성. 시흥, 수원, 안산 등 지에서 호응히는 인시들이 이천으로 모여 들었다. 나. 백현전투 1896년 1월 17일 이천 수창의소에 고종황제로부터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비밀조칙이 전달되 었다. 그날 일본군 수비대 보병 180여 명이 이천의병에 공격을 개시했다. 의벙진영은 이천군 신 둔면 수광리 백현((1빠)에 매복하여 1월 18일 아침 고개 입구에서 진입하는 적을 조성학 부대가 맞이- 2시간가량 격전을 치른 후 짐짓 백현으로 퇴각했다. 이에 일본군이 추격히여 백현 이래에 도달하자 구연영 부대가 전면을, 김귀성과 신용희 부대는 적의 죄우를 에워썼으며, 조성학은 적의 퇴로를 차단하여 사빙써l서 에워싸고 적을 궤멸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다. 이현전투 1896년 2월 12일 백현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약 200명의 병력으로 이천을 향해 다시 공격해 왔다. 김태원은 1초군을 거느리고 최전빙벼l서, 조성학은 1초군을 거느리고 원적산떠l때1J1)에서, 구연영은 이현많싸) 동구에서, 신용희와 심종만은 각각 1초군을 거느리고 김태원의 후빙벼l서 매복했다. 전투는 종일 계속되고도 끝나지 않았다. 디음 날 새벽 다시 접전에 들어갔다. 10시경 검은구름이 하늘을뒤덮고 큰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은강한서북풍을타고눈보라로 변했 다. 일본군은 북동쪽에서 눈보리를 등지고 공격해 왔다. 의병들은 동남쪽을 의지히여 북동쪽에 서 오는 일본군을 맞았는데, 들이치는 눈보라-에 눈을 몰 수도‘ 지척을 분간할 수도 없었다. 부 1 조선 후기에 설치된 특수병종의 하나 각 아문에 소속되어 화포(火페)블 주로 다루었고 화기(火싸) 관리와 화약고 지키는일읍맡았디 2. 경기도 국권회복운동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