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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전투로 조선군은 전사 350명, 부상 20명의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미국도 더 이상 어떻게 해 볼도리는 없어 물러갔다. 미국군이 물러간 뒤 대원군은 “洋핏慢犯 非l懶lj和 ;主까l찮國(서양 오랑캐가 침입히는데. 씨우지 않으면 화친책}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대”고 히는 척화비를 전국에 세웠다. (3)개화파의형성 1860년 영불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자 조선사회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오경석(u.단慶勳은 청국(중국)어를 히는 역관으로 1853년 4월 이래 13차례나 중국 을 오갔다. 오경석은중국의 위기기-곧 조선에도 미쳐올 것을 일었다. 그는 청국에서 100권짜리 세계지리 대계 r해국도지」(海國텀l志)와 10권짜리 세계지리책 r영환지략ii끓環志뻐옴) 등의 책을 구입 해 와서 친구 유홍기와 함께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조선이 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 울북촌 양반층의 영민한자제들에게 개화시상을 교육시켜, 혁신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박규수(朴}圭‘펴는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인데, 1861년과 1872년 두 차례 오경석을 대동하고 중 국사신으로 가서 청국의 위기상황과 서양의 문물을 받이들여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청국의 양무 운동을 보고 개국(開國) ·개화 펼요성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귀국 후 흥선대원군에게 개국의 필 요성을 역설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지- 1874년 9월에 시-직하고 그의 북촌 그의 집 사랑빙F에 박영교·김윤식-김옥균·박영효·유길준·서광범등젊은양반자제들을모아개화사상을가르쳐 개회운동의 선구적 인물들을 기르게 되었다, 3) 정국의 동요와 국권위기 (1)고종의친정과개항·개화정책 1873년 대원군이 물러났다. 일본은 조선 개헝을 강요할 목적으로 1875년 5월초 운요호(갚揚 號) 등군함 2척을파견했다. 운요호 등은 9월 20일 강화도 초지진(草효劍에 상륙을 기도하다 포 26 II . 경기도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