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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들을 대대적으로 탄입하면서, 이가환, 정약용 등 뛰어난 인재들을 처형하거나 유 배했다. 중 앙과 지빙벼 l 극심한 권력형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 1862년 봄 부패한 정치를 견디다 못한 경상 도 진주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민란은 경심벼l서 전라도 충청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삼남 민란 또는 임술(1862) 민란이다, 그 시기 최제우 (崔濟愚‘ 1824∼1864)는 1860년 4월 5일 동학 짜젠)을 창도하였다. “사람이 히늘” [A물天 ]이라는 동학의 가르침에 감동히여 입도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동학의 교세는 교조 최제우를 처형했음에도 제2대 교주 최시형(1827∼1898)의 지도력 하에 비약적으로 커졌다. 비슷한 시기인 1863년 북한 지방에 가뭄이 휩쓸자 함경도 지방민들이 집단적으로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이주를 시작히였다. 개간할 땅은 널려 있었다. 1867∼1869년 사이에 티진해, 안 치혜, 시디미의 3개 마을이 형성되고, 이주 민이 1,800명에 달했다. 1869년 대기근 때는 11∼12 월 시아에 4,500명이 넘어갔다. 1870년대에도 한인들의 이주는 계속 이어져 수이푼, 슈판, 레 푸강가와수찬계곡등남부 연해주지역에 시닐리코프, 코르사코프, 푸틸로프카, 크로우노프카 등의 촌락들이 계속 생겨났다. 대체로 시베리아 철도가 개통되던 1900년까지는 철도, 도로, 항 만, 공공시설 건설 등 연해주 개척에 한인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러시아당국도 부정적이지 않있다. 만주는 청 왕조의 발상지여서 봉금지역으로 설정하여 조선인의 거주를 금하였으 나, 1860년 대 조선북부지역에 연속적인재해가발생하자수천 명이 집단적인 이주를개시하였다. 1880년 부터는 조선 지방관부의 묵인 하에 북간도지역에는 한인촌락이 형성되고, 1894년 청일전쟁의 발발로청국 의 통제력이 으함되자조선정부는간도지역의 한인이주민들 에 대하여 적극적인정 책을 강구하 기 시작하였다 . 1903년에 이범윤 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히여 한인 이주민들을 관할 하게 하였다. 이러한 북쪽 변방 주민들의 연해주 만주 이주는 이후 해외 독립운동의 중요한 기 반이되었다. 24 ” 경기도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