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page

두 차례 보고한 보고에서 여성 2명을 포함하여 37명이 학살되었다고 확인하였다. 이중 기독교 인은 10명, 천도교인은 25명이며 부인 2명이 남편을 구하러 가다가 노AJ써l서 사잘되 었다. 아리다 중위는 교회에서 집단학살을 지-행한 후 10분 거리의 향남면 고주리 김흥렬의 집으로 들이닥쳐 백낙렬의 행방 을추궁 하며 김흥렬을 비롯 김성렬(金멜냈!) ·김세열(企IH;烈) ·김주업(金떠 業) · 김주남(金周南) · 김흥복{金興빠 등 일가족 6명을 포빅하고 짚단과 나무로 덮고 석유를 뿌린 후생화장을했다. 일제는 집단학살의 야만적 침극에 쏟아지는 국제적인 비난을 피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왜곡 하였다. “경찰이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을 미을 교회에 초대하여 호의적인 상담을 가지려고 하였 던 바, 그들이 모였을때 몽둥이와지팡이 등으로 일본군인을공격하였고, 이 혼란한통에 램프 가 엎드려져서 교회에 불이 붙고 이 불 때문에 많은 사람이 티축고 어떤 사람은 탈출하려다 총 에맞아죽었다.” 일제는 아리대.fr田) 중위를 비롯한 제암리 집단 학살 책임지-에 대해 견책 등 경미한 처벌로 끝내고덮었다. 104 II. 경기도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