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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깅)기타;제암리학살사건 1919년 3월 28일 송산면 사강리 만세시위에서 노구치(봐| l廣三) 순사부징어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인명을 살싱하다 시위대에 의해 격살되었다. 4월 3일 수원군 죠반면·우정면 시위로 화수 리 주재소가 불타고 가와바티-(111피“”!}太떼)가 시위대에 총격을 기-해 인명을 살상히-다 격살되었 다, 4월 1일과 2일 안성군 원곡면 시위대가 양성 주재소와 원곡 면사무소를 불태웠다 . 수원과 안성의 이들 시위는 전국에서 가장공세적인 만세시위였다. 4월 4일 새벽 일본군 제20사단 %여단 78연대 소속 아리다써· rn) 중위가 이끄는 1개 소대의 보복민행은회수리를시작으로수촌리 힌각리 조암리 석포리 조반리·어은리·벽우리 -사곡 리 고온리 덕정리 독정리-사랑리 회산리‘운평리‘원안리·쟁미리·고주리-이화리등우정면, ;싼면, 팔탄면, 향남면 등 전체 미을에 걸쳐 자행되었으며 주로 。pJ수색을 하며 민7에 방회­ 해게 1백여 채를 태웠으며, 무단 발포로 20여 명의 시장지를 냈으며, 5백여 명의 주민에게 고문 과폭행을가했다. 4월 5일의 2차보복은수비대가수촌리에 다시 들려 불타고 남은8채의 기옥을깥샅이 수색하 였다. 이때 오전에 산으로 피신하였던 주민이 집으로 내려왔다가 검거되어 발안리주재소로 꿀 려가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4월 7일의 3차 보복은 일본수비대가수촌리 가장말을 비롯하여 꽃 말, 용딛μ굴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주민 130여 명을 꿀어내 발안리주재소로 꿀고가 맛혐 l 묶 어 뭉둥이질했으며 피투성이가 되면 길가에 버렸다. 4월 8일 4차 보복으로 수촌리 1차 보복 때 방화하고 남은 8채의 기옥 중 4채에 다시 빙-화하였다. 이와 같이 네 차례 보복으로 수촌리는 42 채의 기옥중 38채가방화로소실되었고, 천도교전교실과강습소, 이봉구·백닥렬의 기옥등모 두소실되었다, 수비대는 4월 4일부터 4월 13일까지 모든 마을을 보복한 후, 4월 15일 오후 2시 반경 아리다 중위를 앞세우고 제암리를완전히 포위하며 ‘교회로 전원 다 모이리3고 시달하였다. 주민들이 제 암리교회당으로 모이자수비대는 교회당문을 폐쇄하고 석유를 뿌린 후 방회를 하였다. 이중홍 순진(iJlii'채ut)은 밖으로 나오다기- 총에 희생되었고, 오직 노경태파파랬) 한 사람민- 탈출에 성공하 고, 나머지 사람들은 교회당 안에서 집단학살되었다. 이날 교회딩벼l서 참살당한주민들은 23명 이라 하고 있으니, 주서울 미국 총영시- 앨런 홀즈버그는 4월 23일과 5월 12일 미국무장관에게 3. 경기도 3·1운동 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