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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희(金昌羲)는 강원 화천(華川) 사람이다. 1919년 4월 23일 화천군(華川郡) 화천읍(華川邑)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김창희는 3월 21일 김은규(金殷奎)와 화천읍 장날인 4월 23일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래서 김은규의 아들에게 '대한독립국만세'·'화천면민 대표자 김창희'라고 쓴 기를 제작하게 하였다. 또 박성록(朴成祿)·김한식(金漢植)·김용구(金容九) 외 21명을 집으로 불러 시위 참가를 권유하였다. 한편 하남면 논미리(下南面 論味里)와 구운리(九雲里)·상서면 노동리(上書面 蘆洞里), 그리고 화천면 풍산리(豊山里)에도 연락하여 만세운동 추진을 계획하였는데 거사 전날 밤 풍산리 주동인물이 붙잡히는 바람에 23일 장날 화천읍의 일제측 경비는 더욱 삼엄하였다. 이 사실을 몰랐던 김창희와 신읍리 주민들은 기를 앞세우며 화천읍으로 향하였다. 시위군중은 동지화 고개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일본 헌병과 마주쳤고, 격투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헌병 오장(伍長) 야상미희남(野上美喜男)과 상등병 조판무리(早坂茂利) 등을 붙잡아 매를 두들겼다. 그러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헌병과 수비대가 출동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김창희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7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