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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인을 선동하였다 또한 30일 참집 인원을 조사한 것은 후일 뿔참자를 문 책할 재료를 얻기 위함이다 -- 토지조사사업은 조선총독부의 소유지를 돗하는 국유지 (|핑l감빼)를 강제로 칭-출하는데 최우선의 과제를 두었디 이는 국유지만 창출할 수 있다면, 자본의 지출을 수반하지 않고 무상으로-식민지 통치권력을 기반으로-광대한 토지 를 일거에 점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많은 토지를 무력으로 국유지회- 함으로써 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에서 최대 지주가 되었음은 제 1절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위의 차료에 나오는 ‘국유지’ 란 토지조사사업으로 강제 창출 힌-조선총독부소유의 토지를말하리라생각한다 어썼든 농민들은 토지조사사업의 중심과제였던 국유지를 창훨하는 과정 에서 가장 큰 피해자였으며, 이에 강한 불만을 가졌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불만이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고 나아가 계급 자각에 이르고 있음은 선 구적인 사례에 속한다. 독립이 되떤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가 된다는 홍순칠 의 선동은, 전통적인 ‘경자유전’ (차휘감III) 의 사고에서 진일보하여 토지문제 의 플레비안(plebeian〕적 해결을 소박한 형태로 제기하고 있다. 똥순칠이 비 록 소작인 몇 명에게 시위에 참가히-기를 선동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시흥지역 에서는 일제가 소유한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이 매우 많았으며, 이 선동이 토지소유 욕구 강한 이들 소작인의 의표를 찌르는 큰 반향을 일으켰음은 분명 하다 홍순칠의 선동에서 보이듯이 3 · l독립민세운동 당시 일부 민뚱들은 공화 제 사상, 나이-기- 시-회뚜의 사상까지 받아들이고 있음이 눈에 띈다. 홍순칠의 경우와 같이 어느 특정한 지역은 아니지만 총독부 경무국(썩修시)이 경상남 도의 민정보고에서, “하충민 계급 가운데는 아직도 독립만세를 고땅하는 자기- 있는데, 그들긴에는 조선은 이미 독립되었다. 그리고 대통령이 선뜰되면 국민 ------- …… [4] 광명지역의 3· l독립만세운동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