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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6배나 증가하고 있음은 매우 중요하다 동척이 소유한 토지의 일부는 1918년 경기도어 l 정착한 일본인 농업이주자에게 할당된다. 이들에게 할당된 토지를 보면 답이 862정보, 전이 230정보로 모두 1,029정보였으며, 이들의 평균 경작면적도 전·답을 합쳐 약 2정보의 규모였다. 이는 당시의 농지소유 상황과 비교할 때 부농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토지조사사업에 따른 토지의 약 탈과 이에 수반하는 일본인 농업인구가 한국으로 유입되는 현상은 한국 농촌이 더욱 봉건적으로 편성됨을 뭇하며, 이는 바로 한국 농민의 몰락과 연결된다. 시흥지역에서도 이러한 일반 상황은 예외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따라 서 시흥지역에서도 토지조사사업에 따른 토지약탈과 일본인 농업이민의 증가 는 시흥지역 농민들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여 농민들의 몰락을 재촉하였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에 저항하는 집단의지가 시흥지역 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는가장큰배경이라할수있다. 2) 민훌의식의성장 3 · 1독립만세운동 당시 시흥지역의 운동과정에서 일제의 식민지 농업수탈에 농민들이 강하게 저항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시흥군 수암면에서 는 3월 30일 오전 10시에 면내 l81R 동리의 약 2천 명이 바립동(牌立洞)에 모여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 때 만세시위를 주동한 한 사람이었던 홍순칠(供 핸 t;당 42세로 적업은 농엽, 주소·본적은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互里 482번 지)의 판결문에서 인용한사법경찰관의 신문조서를틀어 본다. 자기는 원래 조선독립을 희망하는 한 사람인데 위 독립을 기도하려면 많은 사람이 모여서 시위운동을 할 필요가 있다고 믿어 29일 국유지 소작인 수 명에게 대하여 그 날 각 리에 돌린 격문 내용을 얄리고 “조선에 독립하면 국유 지는 소작인의 소유가 되니, 이 때 만세를 부르는 것이 득책이다.”고 권고하여 제2장」광영지역 3· l독립만세운동 배경 • 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