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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12장 光明뼈域 3· 11훼효를훌풀llJ 背景 1) 시흥지역의 수훨현황 3월에서 4월 중순까지 시흥지역에서는 집회 횟수가 23회에 10,580명이 시위 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이를 호구수로 말하면 전체의 80%에 해당한다. 전국 의 추세와 마찬가지로 농민층이 중심을 이룬 시흥지역의 3·1독립운동은 이 지역에서 자행된 일제의 수탈과 직접 관련을 맺고 있다. 이는 시흥지역 안에 서 일어난 인구의 변동상황을 보아도 알 수 있다. 1910년 안산· 시흥‘과천을 포괄하는 시흥지역의 조선인 호구수는 11,718 호였으나, 1918년에는 11,197로, 1910∼1918년 사이의 쪼선인 호구수는 521호나 줄어들었다. 반면에 일본인의 호구수는 1910년 32Ei호였으나 1918 년 518호로, 1910∼1918년 사이의 일본인의 호구수는 193호가 증가하고 있 다. 이러한 통계는 시흥지역에서도 일본인들이 농촌으로 진출함에 따라 한국 인 농민의 분해과정이 있었음을 반영한다. 일본인의 호구수기-상공업 지역으 로 발전하던 영동포의 경우 1910∼1918년 사이 단 5호만 증까한 데 비해, 시 흥지역에서 518호나 늘어나고 있었던 사실은 일본인들이 그될의 집단거주 지 역인 영등포를 떠나 시흥군의 각 농촌지역이나 기타 역(購) 푸변으로 진출하 였음을 말한다. 앨본인들의 이동·진출이 해당 지역의 한국인 농촌을 직접 수 탈하는 상업에 종사하거나, 한국인 소유의 토지를 점유하는 농업이민의 성격 을 땀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1910∼1918년 사이에 시흥지역을 떠난 521호는 도시노동자나 도시빈민으로 전락-또 영둥포로 떠난 78호도 마찬가지로-하였으리라보인다. 다음은 시흥지역에 거주했던 농민들의 경제상황을 본다. 한말 시흥지역의 제2장」광영지엑 3· l독렵만세운동 배경 --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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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광명지역 3·1독립만세운동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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