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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조직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구실을 함으로써 반일 항쟁의 제기를 마련하는 데에 큰 몫을 하였지만, 스스로 일제에 투항함으로써 3·1독렵만세운동을 끝 까지 지도해야하는사명을포기해 버렸다. 그러나 진정한 민족해방운동은 33인의 무저항이라는 한계를 넘어 대중 차 원에서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나라 밖의 간도,시베리아·면해주 마침내는 미주까지 퍼져 나갔다.독립만세 시위는초기 (3월상순)에 도시와경기도 · 평 안남북도 동 종교 조직의 뿌리가 강한 곳에서 종교지도자·학생 ·중소상인 등 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그러나 3월 10일 무렵부터 차츰 지방의 군 단위 이 하 농촌이나 산골로 퍼져 3월 말∼4월 초에는 전국적인 시위로 발전하여 최고 절정에 달하였다. 이 과정에서 차츰 농민과 노동지-가 운동의 뚜력으로 동장히- 였고, 시위 양상도 비폭력의 틀에 매이지 않고 한층 격렬한 폭력의 형태로 발 전하였다. 농민들은 3·1독립만세운동의 가장 중요한 투쟁 역량으로서 식칼·낫·도 끼,쇄스랑·팽이·자루·돌맹이 동으로무장하고각지방의 헌병기관과통치기 관을 습격하는 등 각종 시위와 봉기의 선두에 섰다. 이들은 대개 토지조사사 업으로 피해를 받은 바 있었으므로, 관공서나 일본인 토지회사, 친일지주들을 습격하였으므로 소작계약서를 불태우거나 납세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다. 노동자들도 초끼부터 투쟁의 선두에 섰다. 3월 2일의 종로 시위를 첫 출발 로, 동아연초공장의 노동자 500여 명이 파업하고 만세시위렐 벌였으며, 철 도·전차운전수·공장노동자 동도 함께 참여하였다. 3월 중순에는 서울 시내 각 공장의 노동자렐이 보통 때의 10% 밖에 출근하지 않아 대뿐분의 공장들이 조엽을 중단할 정도였다. 서울 뿐 아니라 황해도의 제철 노동자, 평양의 인쇄 직공, 직산 · 운산 · 금광의 광산노동자들도 일제에 맞서 싸웠따. 잡화상·곡물 상·음식점 동 소규모의 자본으로 장사하는 사람들도 곳곳에서 철시를 하며 일제에 항거하였다. 한편 시위에 앞장서 온 학생들은 각 지방으로 흩어져 선 제1장 __ 3· 1독업만세운동 개관 -- 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