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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시흥군에 속한 지역 중 서울과 같은 생활권에 속하였던 지역 즉, 오늘날 서울 특별시에 편입된 지역에서는 서울 시내의 시위와 거의 보조를- 맞추어 초기에 학생들의 시위와 상인들의 칠시에 이어 주민들의 민세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 행렬이 약화되었는데 이는 서울 지 역의 소요에 당황한 일본 경찰이 정보 수집을 철저히 하고 군청과의 연락을 긴밀히 하여 군중이 모이려 하면 항상 기선을 제압하여 경찰과 군대를 급파하 여 집회를 저지하였기 때문이다. 농촌 지역으로 파급되면서 나타나는 특정은 시위 참여에 훤리 이장이 적극 적으로 가담했다눈 것이다. 수암면 비석거리 시위나 군자면 거모리 시위의 경 우에 보이듯 각 동리의 구장(이장)은 30∼40명씩의 동리 주민을 직접 인솔하 거나 통문을 돌려 주민을 모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당시의 향촌 사회가 전통적인 면리제띄 전통 하에 일정한 지식과 소양을 갖춘 이장이 말단 실무를 관장하며 마을의 여론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장들은 동리 유 식자나 청년들과 협의하고 시위운동 계획을 동리 주민에게 딸리거나 격문을 붙여 주민의 참여를 유도하였다. 따라서 통일적인 지도 핵심이 없이도 각 동리 마다 자연발생적뜨로 시위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14. 시위가 진행될수록 주체 세력으로 동장하게 되는 농민들의 의식구조를 보 면 수암면 비석거리 시위의 주동자중 한 사람인 홍순칠은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가 된다”라며 농민들을 설득하여 참여시키고 있다 농 민틀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의 중심과제였던 국유지 창출과정에서 제일 큰 피해자였으며 이에 따라 소작농으로 전락한 열악한 처지에 대한 반발이 매우 컸음을 말하여 준다 이들은 독립이 이루어지면 토지분배라고 하는 농민적 이 해얘 기초한독립국가건설을 어렴풋이나미- 기대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또한 영세 상인들도 시위 에 동조하는 뜻으로 칠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부 행상들 9 뼈'.!-'.채$용깅~tH셰, 앞의 책‘ 263쪽 10 독템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83-287쪽 11 얘밍쩌짜깅rn~칸, 앞의 책, 263쪽 12 꽉린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83-287쪽 ~3 l독렵만세운동의 천개 -- 13 독립운동사면찬위원회, r 톡렴훈동사자료집」제6집,1972.929쪽 67 14 김지원, 『경기도 지방의 :3· 1운동」, 1989. r3 · l 민족해방운동연구j‘ 정년사‘ 327-3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