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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8일 그의 아버지 이종원 (李宗遠)이 동리 사람에게 이 사실을 호소하자 당 시 서울의 배재고퉁보통학교 학생이었던 최호천(센7~ffiJ과 윤의병(또l宜炳) 이 군중을 지휘하고 이종원,김인한(金仁漢) - 최정성(샌 1HiX:) · 유지호(柳콰、 Y띤)·최주환(삶周煥) 등이 100여 명의 군중과함께 이정석의 석방을요구하기 위하여 노온시-리 주재소로 향하였다. 떠나기 앞서 동리에서 만세시위를 벌인 다음 더 많은 군풍을 동원해야 효과가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인근 동리 주민 들을 설득하여 1(〕0여 명이 더 합세하여 주재소에 이르렀다. 이때 군중들은 일 본 순사가 발포할 것에 대비하여 몽둥이와 돌 따위 등을 지니고 갔다. 주재소 에 이르러 이정석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순사들은 불을 끈 채 없는 것처럼 가장하고 가만히 있었다‘ 아무런 응답이 없자 성난 군중들은 주재소 게시판과 벽을 부수어 버리며 일본 순사들을 위협하였다‘ 그리고 군중들은 두 패로 나 누어 순사보 두 사람의 집으로 각각 방문하였으나 부재중이파 실패하였고 군 중들은 다시 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에 일본인 순사가 “이정석 은 본서로 넘어 갔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 없다.”라고 하였지딴 시위대의 항의 가 거세어지자 “내일 본서로 들어가서 이정석을 방면되도록 하겠다”라는 약 속을 하였다. 그려나 군주들은 입으로 하는 약속을 믿기 어려우니 중서를 써 달라고 하였으나 “관리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며 해산할 것을 종용하 였다. 그러나 흥뿐한 군중들은 다시 보통학교 앞에서 시위를 한 다음에야 해 산하였다 s.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이를 주도한 사람뜰은 모두 투옥되 어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3월 29일에는 박달리 주민들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7. 과천면(果川때) 3월 29일 막계리(핏漢파)와주암리(‘맨岩및) 주민들이 각기 고을을중심으로 만세시위를 벌인데 이어9 하리 ( F뿔)에서는 3월 30일 저녁 8시 햇불시위가 6독웹운동핀찬위원회, 위센 책, 279-282쪽 7 짖짧씨I, 앞의 팩, 181쪽 8 독렘운동사핀찬위원회, 암의 책‘ 283-287쪽 ~3: I독렵만세운동의 천개 • 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