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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2월 3일경에는 그 추진계획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김원벽은 이 일을 연희전문학교 학생 청년회장인 이병주(李秉周)에게 알리고 이병주는 다 시 회원 40여 명에게 알려 찬성을 얻었으며, 대관원에 모였던 학생 대표들은 각자 자기 학교와 중둥학교 이상의 학생에게 권고하여 학생충을 규합하였다. 이렇게 하여 뚜익(*썼)이 2월 20일경, 독립선언서를 기초해 놓고서 이제 막 인쇄를 시작하려는 참이었는데, 23일 이승훈과 박희도가 천도교와 기독교 의 합류 교섭을 성공시켰기 때문에 김원벽은 그 독립선언서 원고를 승동 예배 당(將洞禮拜堂)에서 불태우고 학생충도 천도교 ·기독교 측의 추진계획에 참 여 협조키로하였다. 이로써 3·1독립만세 운동의 주도체는 단일화되었으며, 이로부터 그 추진 계획은 급속히 진전하게 되었다. 천도교·기독교· 학생층의 개별적인 독립운동 추진계획이 통합-단일화되고, 불교 측이 이에 가담함으로써 독립선언서에 서 명할민족대표의 인선이 시작되었다. 천도교 측에서는 2월 25·26·27일에 걸쳐 재경 또는 지방 간부로서 당시 서울에 와 있는 이종일(李앓-)·권병덕(堆秉핀)·양한묵(梁파默)-김완규(金 完표) ·흉기조(供꿇*) ·홍병기 (판秉箕) ·나용환(짧龍煥) ·박춘숭(朴챈承) ·나 인협(羅仁l 싫)·임예환(林많煥)·이종훈(李種勳) 동 11명에게 손병희 이하 수 뇌들이 거사 계획을 알리고 서명케 함으로써, 손병희·권동진·오세창·최린과 함께 모두 15명이 서명하게 되었는데, 천도교 간부들을 가담시키는 일은 주로 권동진과 오세창이 담당하였다. 한편 기독교 뜩에서는 2월 26일 정오경, 한강(펴江) 인도교에서 이승훈· 함태영 · 안세환- 박희도, 오화영 (吳華英) · 최성모(필멜짜) · 이필주(李弼柱) 등 이 모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할사람을결정하고 27일 그서명쓸끝마쳤다. 여기에는 이숭훈 양전백-이명룡 유여대(劉tm太) 김병조(金자祚) - 길선 제2장_3· l톡렵만세 운동의 추진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