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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봉기의 주모자로 민용훈, 성우경이 일본사령부에 피검된 상황과 이외 다른 주모자들이 도주하여.아직도 체포하지 못하고 있으며, 농민봉기의 발생원인 은 始興那守의 노동자 모집시의 불법행위이며 피해의 상황 쩡도를 9월 17일 보고했다. 한편 주모자들은 한천변의 聚會時에 군수와 아전들의 불법행위를 논의 성 토하고 청원서를 작성하여 鐵山里에 사는 양인 崔永先으로 하여금 다음날에 청원서를 경기도 관찰부에 전달토록 하였으나 도중에 최영선이 체포되어 그 러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비록 시도는 실패했지만 그런 발상은 보다 진 일보한 방법이 아닌가 한다. 다른 조선후기 농민봉기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방법론이 모색된 것이 2 차 시흥농민봉기씌 특색일 것이다. ‘독특한 방법’ 은 지방관의 비리 사실을 조 목조목 나열하여 이를 신문에 투고하여 광범위한 사회적인 여론을 진작시킨 다는 것이었다. 진주사였던 南重熙는 군수 박우양과 아전들의 비리 사실을 열 거한 투고지를 작성하여 마침 서울에 가는 퇴임한 서리 金元錄에게 7월 14일 (음력) 이를 주면서 서울 도착 즉시 황성신문사에 보내라는 부탁을 하였다. 김 원록은 급한 일이 있어 이기춘에게 부탁했고 이기춘도 읍내인 李明秀에게 부 탁했더니 이명수까 여러 날을 집에 두었다가 의심하여 뜯어보니 군수의 비리 에 대한 투서인지라 관가에 밀고함으로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농 민봉기의 발생이 음력 8월 5일인데 거의 20여 일전에 투고지를 신분사로 보 내려고 했다는 시도는 사전에 주도 면밀한 계획을 세웠다는 일변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활동L지역도 종래의 편협한 지역내에서 탈피하여 서울에 거주하 고 있던 전직 이서배와 지속적인 연락을 취하면서 그곳도 정보를 입수하여 상 황에 대처한 면도 있을 것이나 이를 규명키 위해서는 보다 밀도 있는 연구가 요망된다. 1. 세£갱치의 지배체제의 문란 … , • 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