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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바로 오후 3시 경으로 대문이 폐쇄되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20여 명의 일본인들은 갇혀 있는 몇 명이 안되는 군민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밖에서 관가로 들어오지 못한 군민들은 이에 흥분하여 일제히 관가 내로 돌을 딘져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그러나 숫자의 열세로 관아를 지키던 일본 인과 아전들이 산속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관아를 장악한 분노딴 군민들은 군수 박우양과 그 이-들 그리고 아전들을 포박하였으며 관가의 기뀔을 파괴하 고 의류와 비단을 창고에서 끄집어내어 마당에 쌓아 불을 질렀으며 관속배의 가사도파괴하였다. 관아의 난입과정에서 일본인과의 충돌로 군민은 다수의 사상까도 발생했 겠으나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다만 최영선의 중언에 의하면 l명의 심한 중상(나중에 사망한 민점식)과 2명의 부상자가 있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2 명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그것은 일본인들이 관아에 돌입하는 선두 군민들에게 칼을 휘둘러 이들이 부상당하자 민심이 격양되에 군중의 투 석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군수와 그의 아들이 분노한 군중에 의해 장작더미에 올려져 불타 죽었다는 「대한매일신보」의 잡보란(1904. 9. 17.)은 잘못된 기 사이다- 공초와 다른 까료에 비추아 보면 군중들에 의해 피살된 껏으로 보인 다. 이리하여 빠興쩨은 6년전과 같이 무법천지의 세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 소식을 접한 경기도 跳察府는 소요를 진압하기 위하여 순검품 파견하였 고. 일본공사관도 뼈興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보호하고 사건의 조사를 위해 헌 병과 순사를 잇따라 파견했다. 이에 운집해 있던 군중은 해산하였고 그 동안 도망갔던 쩌前들과 일본인들은 파견되어 옹 이들과 협조하여 민란에 가담한 자와 주모자를 색출하끼에 여념이 없었다 경기도 관찰사 李웹敎는 의정부 참정 디1)'(수솥에게 농민봉기로 인한 피해상 황을 보고 하였으며 신기선은 그 다음 날에 상주하였다. 이에 정푸는 시흥농 민봉기의 안핵사로 安鐘판을 차정 파견하여 조사 보고하게 했다. 딴종덕은 농 ... [6) 한말시홍의 농민운동-[셰l쟁. 19세가 죠션왕죠의 샤회젝 상황] 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