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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흩民훌起의뼈월 第一次 始興앓民!}뿔ii:다는 전임군수가 면직되고 신임군수 이교영이 부임하지 않 는 상황속에서 光武 2년 (1898) 7월 9일(음력) 始與의 둠內(현 서울시 금천 구 시흥동)에서 발생하였다. 거사를 위해서 주모자들은 7월 7일 「沙林퍼文」 (사건의 주모자나 발기인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하기 위하여 사발을 엎어 놓은 모양으로 원을 돌아가면서 성명을 기재하는 격문, 그림쓴 갑오농민전쟁 발생시 사용한 것임)으로 6개면 42명의 집강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이 통문 에는 9일을 기하여 모든 마을의 동민들은 때網의 인솔하에 관내로 모이기로 되어 있었다. 약속한 날 집강의 인솔 하에 일채히 읍내로 운집 하니 그 수효가 수천 명에 달하였다- 운집한 군중들 은 집강의 사회로 먼저 전임군수 분봉오의 가혹한 수탈과 불법행위를 성토하였다. 그런 후에 전임군 수의 재직시에 불법행위를 방조 내지 용이하게 해 준 전향장 이회복, 前首판記 李宗烈, 서기 김홍식, 순교 이희장 둥의 죄상을 8조목으로 나누어 성토하 고 이들의 죄상을 관가에 알리며, 한편으로 이들을 족치하여 그 죄상에 따라 사죄와 이울러 처벌코자 .시흥직산안핵사쁨 하였다. 이러한 험학한 분위기가 감돌자 衝前들은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가 집회가 열리는 동안에 모두 도망하였으며 관청 의 관속들도 피신하여 관가는 텅비어 치안과 행정력이 완전히 마비된 상황이 었다. 3, 농민용기의발발 •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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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농민봉기의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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