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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한다는 것에서만 기인된 문제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향리직은 세습직이었 으나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 자리값인 任{責를 수령에게 지불하고 그 직을 차 지했다. 이렇듯 매관매직에 의해서 치-임된 수령과 임채로 지리를 차지한 향리들은 필연적으로 탐관오리가 되게 마련이었고 상호간 공동보조를 취하여 농민을 수탈하였으며 때로는 깎자의 지위를 이용, 작폐를 자행하였던 것이다. f'.Ci'Oηj?:의 탐학을 중앙정부에서는 그대로 방치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탐 관오리에 대한 가렴주구의 적발, 정계를 위하여 중앙에서는 각지방에 II뛰j~~ ~를 파견했다. 그러나 암행아사에 의하여 적발된 탐관오리들은 흙히 전임수 령인 경우가 많아서 시-후약방문이었으며 암행어사 자신이 세도정치담당자들 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소기의 성과를 기대하기란 매우 어려 운상황이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갚이 지배체제문란에서 기인된 농민들에 대한수령의 탐 학, 향리의 농간과 작폐, 토호의 수탈은 조선왕조 자체의 파탄을 텍미히는 것 이며 농민의 빈란을 일으키게 한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 ... [6) 한말시홍의 농민운동 [세l캘. 19세가 죠션왕죠의 샤희석 상황] 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