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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흥원 (후宗릎, 1864. 1. 12 ∼ 1940. 6. 23 01명 : §흩를. 후元{매) 경기도시흥(해興) 시-람이다. 1919년 3월 28띨 밤 시흉군 서면 소하리에서 아들 이정석이 독립만세 시위 운동에 참가 활동L하다가 노온사리에 있는 경찰관 주재소에 겸거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자 아탈의 석방을 목적으로 곤봉과 돌을 가지고 판민 200여 명을 이끌고 주재소 앞으로 몰려가서 함성을 울리고 주재소를 포뷔하여 게시판과 주재소 건물 등을 파괴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이종원 아들돼 강제연행에 관하여 같은 동리 최호천·윤의병 동에게 이야 기하였으며, 그것이 3월 28일 l 따때의 독립시위가 일어나게 된 발단이 되었 다. 종원은 체포된 후 제 1회 신문조서에서 28일 사건의 추이에 관하여 “1919년 3월 28일 나의 장남 이정석이 3월 27일 밤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 가 이튿날 노은사 경찰관 주재소 순사보 최우창 외 l명에게 인치되었으므로, 같은 날 저녁때 서면 소하리 최호천의 집에 가서 인치된 사실을 알리며 탈환 해줄것을부탁하였다. 최호천은 “그러면 오늘 밤 이민들을 모아서 주재소로 몰려가 찾아 줄 터 이니 안심하라. 닿신도 동행하자”고 하였다. 모여 옹 약 1 백명 가량이 군중과 힘께 주재소로 가서 그 곳을 포위하니 주재소에서는 등불을 끄고 전혀 인기 척이 없었으므로 일단은 두 페로 갈라져서 지-신은 최호천이 인솔하는 쪽에 가담하였으며, 순사보 최우창의 집은 주막의 온돌망이었으므로 주막 주인에 게 “퉁불을 켜라”하여 망 안팎을 수색하였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긍택 순사 보의 칩도수색하였으나 없어서 다시 주재소로몰려갔다 그때 내지(일본)인 순시-가 실내에서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하여 최호천이 이에 대탑하기를 “이정석을 돌리리-”고 체의하니, 그 순시-는 “명일 본서에 가서 놓아 보내도록 조처하겠으니 해산하라”고 하였다. 이어서 나는 “말로 약속한 것으로는 안심 • 3· I육법만셰흘동휴공자·항얻 톡애훌풍가 … 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