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page

14 제주에서의 항일운동과 사적지 재조명 및 활용방안 지 시위 행진하였다. 제주성내를 향하던 중 신촌에서 김시범 등 13명이 경찰 에 연행되었다. 다음 날 3월 22일 제2차 시위행진이 있었다. 조천 장터에서 백응선, 박두 규, 김필원 주도하에 200여명이 김시범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2차 만세시위 를 벌였다. 주도자가 연행되고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다시 3월 23일 검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조천 오일장터에서 백응선, 김연배 , 이문천의 주도로 3차 만세시위를 벌였다. 백응선 이문천 등 8명이 연행되었 다. 1919년 3월 24일 조천 오일장날에 김연배를 중심으로 조천장터에서 약 1500여명의 주민이 검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제4차 만세시위를 벌였다. 김연 배 등 4명이 체포되고 운동의 핵심 14명이 모두 검거되면서 조천만세운동은 일단락되었다. 그 결과 검거된 이들은 1심에 29명이 기소되고 23명이 형을 선고받았다 . 주도자인 김시범과 김시은이 1년형을 김용찬, 고재륜이 6월형 등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주도자 14인은 이후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하여 후학 양성에 힘을 쏟기도 하였다. 이러한 교육운동의 결과 후일 학생들의 항일의식에 영 향을 끼치게 된다. 조천 중심의 제주도의 3.1운동은 만세동산 일대에 제주항일기념관을 건립 하여 기념하고 있다. 매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기도 하다. 4. 해녀항일운동 해녀어업조합의 부당한 수탈에 항거하여 하도리를 비롯한 구좌면의 세화 리, 종달리, 연평리와 정의면 오조리, 시흥리와 우도면 등지의 해녀들이 일으 킨 항일운동이다. 1931년 해녀들의 생산물에 대해 지정한 상인에게 헐값으로 판매하게 하는 지정판매 등의 해녀조합의 수탈에 항의하며 해녀조합과 해녀 측이 합의를 했으나 해녀조합이 이러한 합의를 이행하지 않으면서 직접 투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1931년 12월 20일에 하도리 해녀들은 해녀조합에 대한 요구 조건과 투쟁 방침을 확정하고 시위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지정 판매 반대, 해녀조합 비 면제, 제주도사의 조합장 겸직 반대, 일본 상인 배척’ 등을 요구하였다. 1932년 1월 7일에 하도리 해녀 300여 명이 세화리 장날을 이용하여 본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