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page

제주에서의 항일운동과 사적지 재조명 및 활용방안 13 산을 우려하여 경찰의 수사단계를 건너뛰고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분 국에서 사건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재판 전 가혹한 조사 과정에서 강수오와 강춘근이 사망하였고, 박주석·김봉화·김두삼 등 3명은 수감 중 옥사하였 다. 사건이 종결된 후에도 일제는 법정사 항일운동의 파급을 우려하여 항일 독 립운동의 목적을 사교도의 혹세무민으로 매도하였고 참여주민의 숫자도 70 0 여명에서 300여명으로 축소 보도하는 행태를 보였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지역주민 700여명이 참여한 제주도내 최초이며 최 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써 그 의의가 크다. 조직을 구성하고 무기를 준비하 는 등 6개월여의 사전준비 기간에도 발각되지 않았고, 주도자들이 오랜 기간 동안 은신이 가능하였을 정도로 지역 주민들의 호응이 있었던 무장 항일운 동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항일운동으로 평가된 이후 김연일 등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 28명에게 건 국훈장이 추서되고,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는 제주도특별자치도 기념물 제 6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귀포시에서 법정사성역화 사업으로 상징탑과 의 열사를 건립하고 더 이상 진척이 없는 상태이다. 현재 한라산 둘레길의 동백 길코스로 활용되어 법정사터를 지나가게 되어 있으며, 법정사터에 표지판으 로 법정사 항일운동을 설명해주고 있다. 또한 중문청년회의소와 유족회 중심 으로 매년 10월 7일 법정사항일운동을 기념하는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3. 1919년 조천만세운동 1919년 제주도에서도 서울의 3.1운동의 기세를 이어 태극기를 준비하고 대 한독립만세를 외친 만세운동이 거행되었다. 조천에서 4차례에 걸쳐 있었는데 1919년 3월 21일부터 3월 24일까지 4일간 조천 지역을 중심으로 함덕 신흥 신촌의 주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서울에 유학중이었던 조천 사람 김장환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서울에서의 3.1운동을 제주에서 확장시켰다. 김시범, 김시은, 김장환 등이 3 월 17일경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거사를 발의하여 14명의 동지를 규합하였다.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대형 태극기 4개와 소형 태극기 300여장을 제 작하였다. 1919년 3월 1일의 1차 시위는 미밋동산에 태극기를 꽂고 김시범이 독립선 언서 낭독하고 김장환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조천 비석거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