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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의 항일운동과 사적지 재조명 및 활용방안 11 제주도의 항일운동과 사적지 현황 한금순(제주대학교 문학박사) 1. 제주의병항쟁 1909년 제주의병항쟁은 제주도 전역에 격문을 보내며 제주도 전역의 의병 항쟁을 의도하였다. 고승천, 김석명, 노상옥 등 10명이 창의의 뜻을 모으고 제주 광양에 대장간을 차려 무기를 제조하고, 황사평에서 비밀리에 훈련을 추진시키기도 하였다. 1909년 2월 25일 제주군 이도리 광양동 조병생의 집에서 창의의 구체적인 계획을 모의하고 거사일을 1909년 3월 3일로 정하였다. 거사장소를 관덕정으 로 정하고 의병장에 고승천, 이중심을 추대하였다. 또한 당일 고승천, 김만 석, 김재돌, 양남석, 조병생 등은 대정으로 가서 모병을 시작하고 김석명, 양 만평, 이중심, 한영근 등은 의병을 모아 있다가 고승천이 거사하는 것을 기 다려 가담할 것을 약속하였다. 고승천, 이중심, 김석명 3인은 격문을 작성하 여 발송하였다. 격문과 아울러 구체적 행동 내용을 담은 통고사를 동쪽의 화 북으로부터 시작하여 제주도를 순회하도록 하였다. 이장들은 3월 3일의 관덕 정 점고에 참석할 것을 명하고 있으며 선박의 출입을 엄금하는 등의 행동 강령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이 통고는 왜인을 타살함으로써 백성들을 편 안케 하리라.”라고 창의의 뜻이 항일운동임을 명시하고 있기도 하다. 모병은 대정군 영락리, 신도리, 광청리 등과 제주군 신우면 어음리, 어도리 등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격문이 돌려진 마을에서 리장을 중심으로 출병을 준비하고 있다가 경찰에 발각된 곳은 제주군 신좌면 대흘리와 구우면 두모 리가 대표적이며 두모리의 경우는 상당히 조직적으로 출병을 준비하고 있었 다. 의병항쟁은 모병활동 과정에서 일본경찰에 탄로되었다. 광청리에서 고승천 이중심이 60여명의 리민을 모아놓고 조선 구법의 회복을 위하여 제주성을 습격하자는 뜻을 전달하고 있다는 정보를 파악한 대정주재소가 3월 1일 새 벽 의병대를 습격하여 고승천과, 김만석이 체포되었다. 3월 1일 저녁에는 서 명월리에 도착한 격문이 일본 경찰에 압수되기도 하였다. 3월 4일 아침 고승천, 김만석이 포승을 절단하고 도주하였다. 추적하던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