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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진(李寬鎭) 1862.09.18~1935.08.15 / 3.1운동 / 대통령 표창 이관진은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양양면(襄陽面) 감곡리(甘谷里)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4월 4일은 양양의 장날이었고 아침부터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양양읍에 들어오는 중요한 통로는 5개가 있었는데, 곳곳의 만세군중과 장꾼은 주로 그 5개의 길을 따라 들어왔으며, 집을 떠날 때는 장꾼으로 떠났지만 장터에 오는 도중 또는 장터에 와서 만세 군중으로 변하였다. 5개의 통로 중에서 서쪽 즉 임천리로 통하는 방면에서는 아침부터 만세 군중이 경찰과 대치하였다. 거마리.임천리의 군중과 의병 출신 박춘실(朴春實)과 노용수(盧龍秀)의 지도를 받은 서면 상평리(上坪里)와 북평리(北坪里)의 군중이 모였다. 이관진은 북쪽 길에서 감곡리 방면의 만세 군중을 이원도(李源燾).이원희(李源喜)와 함께 지도하였다. 그리고 동편 낙산사로 통하는 신작로에는 조산리와 사천리 방면에서 최영덕(崔永德).최영원(崔永原).이정희(李貞熙) 등의 인솔로 모였으며, 남쪽 국도를 따라 손양면 가정리이 만세군중이 함홍기(咸鴻基)의 인솔로 들어왔다. 또 서남쪽으로는 서면 용천리의 군중이 당시 구장이던 노병우(盧炳禹)와 최명옥(崔明玉)의 지도를 받으며 선두에는 보통학교 생도(生徒) 최선극(崔善極)과 노병례(盧炳禮)가 든 큰 태극기를 세워 들고 장터로 들어왔다. 곳곳마다 태극기를 들었고, 옥양목으로 만든 큰 태극기를 앞세워 행진했으니, 만세 군중에게 완전히 제압된 경찰은 지금 군청 자리에 있던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더구나 읍내와 부근의 남문리.군향리.구교리.서문리.성내리.청곡리의 주민은 아침부터 이미 만세시위에 들어가 있었다. 시위 후 체포된 이관진은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징역 6월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