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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6월 16일 동아일보는 이런 보도를 낸다. ‘당대의 일도 장관으로서 어찌 차에서 내려 흙발을 밟으랴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박중양 씨는 기어코 차에서 내리지를 않고 촌가에 가서 소를 끌어다가 자동차를 끌어 넘기게 한 결과 겨우 도지사의 위엄은 간직하게 되었다.’ 충북도지사로 있던 박중양에 관한 기사다. 실상은 이렇다. 충북도지사로 부임한지 두달되던 해 법주사를 유람하기위해 속리산을 찾던 중 말티고개에 이르러 차가 막혔다. 시골 소로길에 불과했던 말티재에서 막히자 인근 농가에서 소를 끌고와 차를 끌어넘기게 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박중양은 이후에 보은군수를 시켜 말티재를 확장하게 한다. 박중양의 지시를 받은 당시 보은군수 김재호는 만여호의 군민을 부역에 동원한다. 당시가 농번기철인 6월임을 감안하면 부역에 끌여온 농민들의 불만이 어땠는지는 미뤄 짐작하지 않아도 뻔하다. 이에대해 동아일보는 “ 매우 울분히 여기던 중 더둑이 같은 군에서도 회남면 회북면과 같은 곳은 부역장까지 근 백여리가 되니 인민의 피해와 곤란은 이를 길이 없었다”라고 보도했다. 이 사건은 애교에 불과하다. 박중양의 엽기적 행각은 속리산 법주사에서 정점에 이른다. 당시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박중양은 1924년 12월 26일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트 총독 내외를 데리고 속리산 법주사를 찾았다. 속리산에 도착한 박중양 일행은 법주사 대법당에서 주연을 열었다. 그 당시 법주사에는 여승 200여명이 있었는데 이중 젊고 아름다운 비구니 6명을 선발해 시중을 들게하면서 질펀한 술자리를 벌였다. 이때 박중양의 눈에 20살의 비구나 양순재가 눈에 들어왔다. 급기야 박중양은 비구니 양순재를 데리고 사라졌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며칠 후 양순재는 법주사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박중양에게 당한 분노와 수치심에 목숨을 끊은 것이다. 이 사건은 세달 정도가 지난 뒤 동아일보의 보도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1925년 3월 6일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박중양을 ‘색마지사(色魔志士)’라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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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양은 1959년 87세에 생을 마감했다. 한마디로 천수를 누린 셈이다. 박중양은 일제 치하에서 충남과 충북도지사를 지냈고 중추원 참의까지 지냈다. 1945년 4월에는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이 되기도 했다. 3.1운동이 벌어지자 ‘자제단’을 조직하여 운동의 확산을 막았다. 한마디로 친일파중 거물중의 거물이다. 그에게는 ‘신념에찬 친일파’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독립운동을 하다 변절한 친일인사가 아닌 태생부터 친일이었기 때문이다. 박중양은 관비로 일본 유학을 하며 이토 히로부미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던중 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이 물에 빠졌을 때 박중양이 구해준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건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박중양에게 사례를 하려 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를 받은 박중양은 그의 양자라고 까지 소문이 났다. 이런 인연은 해방 후에도 이어져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를 ‘이토 公’이라고 불렀다. 박중양은 일제 패망이후에도 “독립운동가들이 잘나서 독립이 된것이 아니라 미군이 일본을 쳐서 우연히 독립된 것이며, 미국과 일본이 전쟁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독립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 충북인뉴스(http://www.cbinews.co.kr) 2019.1.10 이런 인물의 불망비가 아직도 아무런 안내판없이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