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裵榮述 獨立志士는 文科에 及第하여 世宗廟에 集賢殿 直提學에 오른 乙甫 先生의 十四代孫 連植의 次子로 一九八二年 論山市 鷲岩洞에서 出生하셨다. 初名은 榮玉이요 字는 景燁이시다. 남달리 氣骨이 壯大 出衆하고 義가 아니면 참지 못하는 性稟이라 公의 周邊에는 恒時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漢學에도 心醉 일찍이 四書三經을 通達하여 士林間 交分이 두터웠다. 一九一0年 日帝의 武力合邦에 鬱憤을 억누를 길이 없어 八寸兄인 裵榮達과 함께 隣近 儒林과 靑年들을 찾아다니며 歎息보다 行動으로 우리도 日帝에 抗拒 主權을 되찾는데 힘을 보태자고 呼訴 盡力하시다가 日警에 쫓기는 몸이 되어 各地로 隱身 潛行하시던 중 一九一九年 抗日獨立萬歲運動이 坊坊曲曲에서 展開됨을 絶好의 機會로 뜻을 같이하는 靑年들과 數 百帳의 太極旗를 만드시어 主로 놀뫼 連山 馬山 장날 雲集한 群衆에게 나누어 주고 不時로 萬歲示威를 누차 主導하셨다. 特히 彩雲面 李根奭 可也谷面 陳學奉 等과 事前謀議 同日同夜에 大規模 횃불 萬歲示威를 擧事키로 하고 八月 十八日 밤 同調 壯丁 四十餘名을 이끌고 論山市 鷲岩洞 수랑골 앞 茅亭山에서 짚단에 불을 피우고 一齊히 大韓獨立萬歲를 絶叫하였다. 미처 山에 오르지 못한 수랑골 대하골 먹골 住民들은 집 마당에서 혹은 골목에서 萬歲소리 드높이니 彩雲 玉女峯 可也谷 金城山 魯城山에서 同時에 불이 오르고 만세 함성은 놀묏 벌에 진동하였다. 결국 榮述公은 榮達公과 함께 主動者로 日警에 逮捕되어 二年의 酷毒한 獄苦를 치르시게 된다. 온갖 懷柔와 拷問에도 同志들의 이름을 숨겨주며 榮達公과 서로 自己 獨斷 行動이었다고 强辯 호통을 쳤으나 民衆煽動한 事實을 適用 笞杖 九十度의 酷刑을 당하셨다. 살갗은 찢어지고 떨어지고 骨折奪骨로 死境에 이르니 들것으로 옮기어 겨우 鷲岩 鄕里에 오르셨으나 出獄後 줄곧 四年間 倭警의 監視下 病床에서 呻吟하시다가 一九二七年 二月 二十一日 公은 亡國의 恨을 품고 享年 三十五歲로 殉國하시니 風雨寒雪 波瀾萬丈의 愛國 一生이셨다. 十二歲 어린 長子 重煥에게 遺言을 하심에 沈黙은 賣國과 같으니 滿洲로 나가 저들과 싸우라 先親 遺志를 쫓아 弱冠이 되자 중환은 이역만리 만주로 苦難의 放浪길을 떠난다. 其后 廣闊한 滿洲 벌이 우리 獨立軍의 活動舞臺가 되었으니 公은 分明 先覺者이시다. 公의 이 같은 事實은 韓國獨立運動史 및 獨立有功者功勳錄 論山地域三一運動史 等의 歷史的 文獻에서 빛나고 있다. 이 같은 公의 愛國忠節을 永世에 기리기 爲하여 裵門의 諸孫과 論山市民의 뜻을 모아 公의 獨立運動行狀을 刻石 紀功하여 높이 追慕코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