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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12월31일 화요일 4 (제156호) 관향조 종친회 호산재(虎山齋)는 밀성박씨 송은공 휘 익(翊) 의장자우당공(휘융)의10世통사랑박동창(朴 東昌)을비롯한이하선세(先世)재실이다. 1960년 후손들의 성력(誠力)으로 정면 4칸 측 면1칸의 팔짝지붕 와가로 왼쪽 2칸의 방과 오른 쪽1칸의방그리고가운데대청에제상(祭床)이 있어매년가을시향을받들고있다. 재실을 감싸고 있는 뒷산은 큰 호랑이가 웅크 리고 앉아 있는 형국으로 재사(齋舍) 이름 또한 이에기인한듯하다. 진양군사(晋陽郡史)의 이곡리(耳谷里)에 대 해 뷺지형이 사람의 귀처럼 생겼으므로 귀실(구 실)이라고도 하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 고 중 앙 에 뫼 등 이 이 어 져 있 어 마 치 귀 안 과 같 이 생기고 입구에 귓밥과 같은 지형으로 되어 있 어 마을 밖으로(마을을 떠남)나가면 못산다는 전설이 있다뷻고 전해져 밀성박씨 통사랑공 후예 의집성촌이된연유를엿볼수있다. 통사랑공은청도군이서면수야리에서출생하 여 20세가 되던 1627년 정묘년에 인조반정에 성 공한 서인세력들은 친명배금정책을 내세웠다. 이에 후금에서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은 3 만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였고, 파죽지세 로 남하하여 1월 25일 황주에 이르자 인조를 비 롯한 신하들은 강화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 하게 된다. 이때 통사랑공 또한 청도를 떠나 지 리산(덕산)으로피난하였다가10년후이곡마을 로이거하였다. 난이 평정된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 곡에서 돌아가시니 아마도 마을 밖으로 나가면 못산다는 전설 때문인가 여겨진 가운데 자손들 은 장례(葬禮)후 묘소를 살피고 효를 행하며 농 사를 본업으로 삼아 세거하게 됨으로써 400여년 집성촌이되었다. 통사랑공의선원세계를보면신라시조왕의적 장자(嫡長子)로서 종통(宗統)을 이은 밀성대군 의후예이다. 중조(中祖)는 태사공(太師公) 휘 언부(彦孚) 이다. 고려 문종(1047년 丁亥) 때 문과에 급제하 여 최충과 함께 태사(太師)를 지냈고 중서령 문 하시중 도평의사를 역임하였으며 밀성부원군으 로 피 봉 되 었 다 . 아 들 을 둘 두 었 는 데 맏 이 는 효 신(孝臣) 차는 의신(義臣)이다. 고려 인종은 양 형제를 효의양신(孝義兩臣) 또는 고려주석(高 麗柱石)이라 부르고 동방대성(東方大姓)이란 어필넉자를하사했다. 효신(孝臣)은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중이 되 었고 평장사로서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천자 가 예로서 대우하여 치사하였고 본국에 돌아와 졸하였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라 사시하고 인 종묘에 배향하였다. 의신은 공부상서로서 종방 인 양신(良臣:彦祥의 아들), 직신(直臣:彦仁의 아들)과 더 불어 세상에서 삼언사신(三彦四臣) 이라알려져있다. 공필(公弼)은 효신의 아들인데 과거에 급제하 여 대장군 도검사 병부상서를 역임하였다. 공은 문무에 재주가 겸비하여 고려 예종(1107년) 2년 에 윤관과 같이 여진을 쳐서 평정했다. 뒤에 진 국공신으로 추존되었고 시호를 충열(忠烈)이라 사시하였다. 육경(育慶)은 공필의 아들인데 1130년 인종8 년에 대장군과 병부상서를 지냈다. 또 1135년에 김 부 식 과 함 께 적 (賊 ) 조 광 등 을 쳐 서 평 정 하 였 다.또,글을올려양현고(養賢庫)를세워서많은 선비를 기르게 하고 또한 모든 고을에 널리 학사 를설립하였으며국사를보살펴수정하였다. 대화(大和)는 육경의 아들인데 대호군 이부상 서였으며 수문학 대제학으로 문무가 겸전하였 다. 간(幹)은 대화의 아들인데 문과급제로서 병 부참정(兵部參政)이었고 시호는 양효(良孝)이 다. 배위는 추화군부인(推火郡夫人) 밀성손씨 (密城孫氏)인데 여지승람에 기록 되어 있다. 두 아들을두었는데영균(永均),세균(世均)형제이 다.이두형제가곧은·행산파의파조이다. 은산부원군파의 파조이신 휘 영균(永均~130 0)은 고려조에 익대공신으로 벼슬은 판도판서 와삼제(三帝)를역임하였고응천군으로봉군되 었다. 뒤에 또 은산부원군(銀山府院君)으로 추 봉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으로 사시되었고 묘소는 경남 창녕군 계성면 광계마을 뒤 을좌 (乙坐) 구릉에 있다. 부인은 능성구씨(綾城具 氏)로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을 지낸 문정공 (文貞公) 의( 陞)의 딸이다. 배위(配位) 재령이 씨(載寧李氏)는 신라 경순왕의 사위인 재령백 (載寧伯)을지낸우칭(禹稱)의후손이다. 은산부원군 휘 영균은 슬하에 아들 셋을 두었 는데 첫째는 익(翊 : 초휘는 天翊)이요, 둘째는 천경(天卿),셋째는문경(文卿)이다. 은산부원군의 장남 익(翊:1332~1398)의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이다. 고려 공민조 에 급제하여 사재소감, 예부시랑, 중서령, 예판 등벼슬을했다.이성계와같이남정북벌을했다. 그러나 려말 국정이 쇠퇴하고 어지러워지자 벼 슬 을 버 리 고 밀 주 송 계 에 돌 아 와 정 포 은 , 이 목 은 , 길 야 은 등 여 러 선 비 들 과 시 국 을 개 탄 하 고 걱정하면서문학을즐기고토론하였다. 이성계가 등극한 후 송은 선생을 다섯 번이나 불러 좌우정승을 제수하려고 해도 끝내 나가지 않았고세칭8은이라했다.시호는충숙(忠肅)이 며 두문동 72현으로 경기도 파주의 고려 통일대 전에 고려 충절신으로 배향되었고, 그 외 밀양 덕남사 청도 용강서원, 산청 신계서원, 창원 운 암서원 등에 배향되어 있다.그리고 지난 2000년 9월 경남 밀양시 고법리 소재 송은선생 고분에 서 벽화가 발견되어 국가 문화재 사적제459호로 지정되었으며, 후손들은 송은공파라 부른다. 송 은공의 아들은 넷인데 우당공 휘 융(融)ㆍ인당 공 휘 소 (昭 )ㆍ 아 당 공 휘 조 ( 調 )븡졸 당 공 휘 총 (聰)이다. 통사랑공의 7대조부 우당공 휘 융(融)은 이조 정랑을 역임하였고, 우당공의 아들은 소고공 건 (乾)으로 병조판서 김철성(金哲誠)의 딸과 혼인 을 계기로 밀양에서 이거하면서 청도 밀성박씨 소고공파를여는입향조가되었다. 소고공 박건은 무과에 올라 훈련원 봉사를 거 쳐 용양위 부사직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승원 역시 무과를 통해 입사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 정3품) 충순위 부사직을 역임하였고, 사후 충순 (忠順)의시호가내려졌다. 부사직 승원의 장남 하담(河淡)은 중종 11년 (1516년)에 사마시에 합격한 후 유일로 천거 받 아 현량과에 추천되었으나 응시하지 않고 청도 의 운문산 아래의 눌연(訥淵)에 정자를 짓고 소 요당이라 이름하고 당대의 거유들과 교류하며 여생을보냈다. 증조부 휘 영(潁)의 호는 성효재(誠孝齋)로 순릉참봉(성종의 비 공혜왕후 한 씨의 능)을 역 임하였으며, 참판에 증직되었고, 조부 휘 경연 (慶 延 ) 의 자 (字 ) 는 유 중 (裕 仲 )으 로 아 들 찬 ( 璨), 우(瑀) 숙(琡) 삼형제가 임란에 혁혁한 공 을세워공조참의에증직되었다. 아버지 휘 찬(璨)의 자(字)는 숙헌(叔獻) 호 는 운옹(雲翁)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중추 (同中樞)이다. 1592년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 옴에 종숙부(휘 경전), 숙부(휘 경인) 등 제공 (諸 公 )이 자 제 들 을 모 아 거 의 ( 擧 義 )를 도 모 하 고 자 공(公)이 분연이 따르기를 청하며 손가락을 깨물어 스스로 맹세하고 인하여 운문산에 들어 가서 의진(義陣)을 설치한 후 매 전투에서 수많 은 전공을 세웠으니 청도 14의사의 한분으로 적 의 수급을 벤 것이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특히 매복 전술에 능해 왜장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었다.이에 조정에서 이 사실을 듣고 사재감참봉 (司宰監參奉)을제수하였으나군사의일이끝나 지않아나아가지않았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임진란이 평정되 자 비로소 선전관 겸 비변랑에 제수되어 훈련원 주부와 첨정을 역임하였고,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1604년 경성판관으로 나갔다가 곧 북도우후((北道虞候)에제수되었다. 1624년(인조 2븡甲子)에 사신으로 충원되어 명 나라를 방문함에 특별히 가선대부 동중추에 제 수되었으며, 환국길에 압록강에 이르자 복명(復 命)하는 시일이 급하여 노정(路程)을 배로 빨리 달리다가 말이 넘어져 낙마의 상처로 인해 국경 근처에서세상을떠났으니향년54세이다. 경북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에서 가선대부 동 중추 휘 찬(璨)과 어머니 고성이씨 사이에서 아 들 5 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난 공(公)의 휘는 동 창(東昌), 字는 사안(士安), 호(號)는 퇴산(退 山)이다.1627년 정묘호란에 살림살이를 가지고 집을 떠나서 영남좌도에 분산(分散)하여 진주· 덕산등지에서 우거하였다.병자호란(1656년)이 평정되자 고향 수야리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였 으나 갑작스런 재앙을 얻어서 망설이다가 결행 하지 못하고, 이후 종인(宗人)들이 이웃에 이사 옴으로 인해 비로소 이곡(耳谷)에 거주하고 호 (號)를 퇴산(退山)이라 하였다. 1656년(효종 7븡 丙申) 집에서 돌아가시니 자손들은 례(禮)에 따 라 장례를 치르고,농사로 본업삼아 지금까지 비 록 넉넉하지는 못하나 조상을 위하는 위선에 충 실하고, 외계의 사물에 치우치지 않으며 호산재 를 중심으로 재계(齋戒)하며 성심성의껏 종향 (從享)하고있다. 통덕랑공은 부인 진양정씨와의 사이에 아들 희한(希漢)을 낳았는데, 公은 어버이를 지성으 로 섬겨 상을 치루는 동안 조석으로 묘소를 살폈 으니 이웃이 모두 효자라 일컬었다. 손자 휘 문 린(文 몇)은 집안이 매우 청한(가난)하였으나 농 사와 독서를 업으로 삼았고,만년에 학문을 좋아 하여 호를 만학(晩學)이라 하였다. 증손 휘 학희 (鶴凞)는가선대부한성부좌윤에증직되었다. 맏 현손 휘 증일(增鎰)은 문사(文詞)로써 일 찍이 안동의 소호리(蘇湖里)대산(大山)이상정 (李象靖, 1711~1781) 선생과 교유하였는데 호가 서롱(西聾)이다. 서롱공의 아들 행범(行範)은 내와(耐窩)남국 숭(南國昇) 선생에게 수학하였고, 학행과 효행 이 뛰어나 지역사림의 천거로 가선대부 형조참 판에 증직되었으며, 그의 아들 창식(昌植)은 통 덕랑(通德郞, 정5품)이고, 손자 정명(廷命)은 증 가선대부 행 판서이고, 증손 휘 영묵(英默) 또한 효행으로 증 가선대부 행 참판으로 진주지 (晋州誌) 각각 등재되었고, 휘 정호(廷昊븡통덕 랑의子)의아들상묵(相默)은사헌부감찰에오 르는 등 대대로 효를 실천하며 향리의 모범이 되 고 있어 후손들은 입향 4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선조의 유지인 효를 덕목으로 삼고 자손이 번성 하여 이곡마을을 중심으로 문산읍 지역에 산재 하여살고있다. 이곡마을에후손들은 6.25전쟁 이전에는마을 의 70%를 차지하였으나 현재에는 60여가구 중 3 0여세대가거주하고있다. 현세에서도 순엽(淳燁븡한국성씨연합 총재) 고문을 비롯 순오(淳午븡새마을금고 새진주 부이 사장) 회장, 동상(東相) 이사 겸 감사븡 명상(明 相)총무 등이 중심이 되어 청년들이 스스로 찾 아 각종 행사에 많은 성손들이 모이면서 주변사 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어 호산재 전망을 밝게 하 고있다. 뱚재/실/탐/방 밀성박씨호산재(虎山齋) 경남진주시문산읍이곡리113 집성촌이곡리전경. 호산재재향광경(지난 달 16일) 제향에많은종원들이 참례하고있 어대조적이다. 호산재전경. 호산재 뱚집성촌이곡리입촌배경 뱚통사랑공의선원세계 뱚통사랑공(휘동창)생애 뱚통사랑공의후예 밀성박씨 무은공종중(회장 순정)은 지난 1 1일(음11.15) 오전 10시 30분 남원시 대강면 풍산리 곡촌마을 회관에서 2019년 결산총회 를 갖고 수입 및 지출·감사보고 등을 원안대 로 처리하고 △정기총회 일정변경 △남원시 왕정공원조성사업 편입부지 처리의 건 △종 중토지 관리의 건 △낙동 태사공(휘 태겸)묘 역 천 묘 의 건 등 현 안사업을 논의한 가운데 순정 회장은 회의에 앞서 인사말을 통해 성원 해준 종원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새해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줄 것을 당부 하고 운수대통하길 기원한다며 덕담을 빼놓 지않았다. 이날 회의 결의 내용을 보면 △정기총회 일 정을 기존 음력11월 15일에서 무은공 부조묘 (풍양사) 제향일인 음3월 21일 개최키로 하 였으며, △남원시 왕정공원 조성지에 편입예 정인 신정동 산31-1 임야에 대해서는 적정한 선에서 매각키로 하고 집행부에 위임했다. △ 종중 토지관리의 건은 현재 연명으로 되어있 어 등기권리자가 사망할 경우를 대비하고 효 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영농법인 설립을 추 진키로 했다. 이외에도 토지 임차료, 낙동 제 향일 등 제반현안을 논의하면서 2019년 한해 결산을 마무리하고 새해 더 발전하는 종중을 만들어가는데함께노력할것을다짐했다. 이날 회 의가 개최된 곡촌마을은 인조 개옥 에 참여하여 광해로부터 옥쇄를 받아 인조에 게 전달하고,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등 진무 공신(振武功臣) 2등, 정사원종공신(靖社源 從功臣)1등 공신에 녹훈 된 무은공 후손들의 400여년 집성촌이다. 무은공은 박세중 선생의 자(字)는 군극(君 極), 호(號)는 무은(霧隱) 또는 세칭 무웅(世 稱 武雄)이다. 시조왕의 50세손이며 밀성대 군 휘 언침의 21세손으로 좌상공(휘 춘)의 8 세손이다. 선조 23년(乙未 1595년)에 남원부 갈치방 황죽리에서 출생하여 광해10년(1618 년)23세에무과에합격하였다. 병자호란에는 의병을 일으켜 상경하던 중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 하면서 偸生非是男兒事(투생비시남아사, 억 지로 살고자하는 것이 사내가 할 일이 아니 다) 愧恨不從 三學士(괴한부종삼학사, 삼학 사를 따라죽지 아니함이 부끄럽구나)라는 유 명한시를남겼다. 1622년 3월 22일 서거(逝去)하여 숙종8년 (1682년)에 부조묘지전하여 세워진 부조묘 가 전라북도 문화 재 자료(풍양사) 제155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이날 회의에는 상급종친회 상섭 총무 이사가 함께했으며,회의 후에는 준비된 오찬 과 함께 송년행사와 새해맞이 덕담을 주고받 으며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게 한 해를마무리했다. 무은공(휘세중)종중결산총회성료 총회일정조정및남원시왕정공원조성사업편입부지등현안논의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