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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12월31일 화요일 12 (제156호) 기획 16세기말에 발발했던 임진왜란은 평화로웠던 조선사회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당시 조선에 살고 있던 모든 백 성들은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해야 했다. 특히 조선 초 서남해안 지역에 출몰했던 왜구의 약탈 을 제외한다면, 비교적 조선 사회는 큰 전란의 피 해 없이 200여년을 지내왔다.때문에 ‘동아시아의 삼국전쟁’으로 평가받는 임진왜란이 진행되는 동 안, 선조를 비롯한 조선의 위정자들과 향촌사회 의 양반,일반 백성들은 맨 처음 경험한 전쟁의 충 격에우왕좌왕할수밖에없었을것이다. 전쟁 초 호남의병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은 고경명과 김천일을 들 수 있다. 두 의병장의 이름 은 고등학교 교과서 중 지역별 의병활동을 표시 한 지도에서 거의 빠짐없이 확인될 정도이다. 특 히 고경명은 광주출신으로 담양에서 거의하였으 며 호남 최대 규모인 6,000여명의 의병을 이끌었 으며, 김천일은 나주출신으로 가장 빠른 시점에 선조를 구하기 위해 출병했던 인물로 높이 평가 받는다. 사실 본 발표에서 다루고자 하는 회재 박 광옥은 고경명, 김천일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다만,그 이유에 대해 발표자는 박광옥의 의병활동이 임진왜란 당시에 큰 역할을 하지 못했던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고, 지금까지 우리가 박광옥에 대해 관심을 충분히 기울이지 않았던데에서이유를찾아야한다고생각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임진왜란 의병 관련 연구 성과를 검토한 글에서도 거듭 확인할 수 있다.즉, 잘 알려진 몇몇 의병장들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 께 싸웠던 혹은, 그들을 도왔던 휘하의 인물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 이렇게 임진왜란 당시 박광 옥의 의병활동을 살피는 것은 기존 연구의 문제 점을 보완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다. 동시에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박광옥의 의 병활동과 이후 지역 사림들과 후손들에 의해 진 행된 박광옥의 추숭활동에 대한 이야기까지 본고 에서 함께 다루고자 한다. 그리하여 본고는 그의 향촌활동에 대한 연구 및 문학 세계에 대한 연구 와 함께 박광옥이라는 한 개인사를 정립한다는 점을보더라도주목할만하다. 박광옥의 의병활동은 임진왜란 발발 초 호남지 역의 의병활동 창의과정 속에서 살펴보아야 한 다.특히 호남 최초의 의병장 김천일,호남 최대의 의병장 고경명과 함께 호남의병의 창의를 주도한 인물이바로박광옥이었기때문이다. 우선 김천일의 경우, 1592년 5월 2일~6일 사이에 창의 기병할 것을 결심한 것으로 파악된다. 4월 30 일 의 선 조 파 천, 5월 2~3일 일본 군의 한성 함락 소식 을 들 은 김 천일 은 고 경명 (高敬命, 1533~1592), 박광 옥(朴光玉, 1526~1593), 정심(鄭諶, 1520~1602), 최 경회(崔慶會, 1532~1593) 등에게 글을 보내 거의할 뜻을전했다.이를통해보면,당시김천일에게있어 서 박광옥은 고경명, 최경회 등과 함께 임진왜란의 위기상황을 함께 고민할만한 정도의 호남의 대표 적인 명망가였던 셈이다. 또한 광주의 박광옥(67 세)은 나주의 정심(73세)과 함께 지역 내의 원로 역할을했던것으로보인다. 이후 김천일은 5월 6일 담양에서 고경명과 만 나 의병창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회합에서 김 천일과 고경명은 함께 의병을 창의하는 것에 대 해 논의하였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창의과정을 조율하던 중 견해차가 발생하였던지 따로 거병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김천일은 급박한 상황이므 로 빨리 북상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 고경 명은 여러 지역의 군사를 모아 막강한 의병군을 만 든 이 후 에 북 상 해 야 실 효 를 거 둘 수 있 다 고 판 단했던 것 같다. 이에 김천일은 나주에서 의병을 모아 빠른 시점인 5월 16일에 기병하여 6월 3일에 출병을, 고경명은 보다 늦은 5월 29일에 담양 추 성관에서 기병하여 6월 11일에 출병하였던 것이 다. 그리고 이때를 전후하여 박광옥은 주로 고경 명과함께호남의병의결집에주력하였다. 박광옥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에 고향이었던 광 주(光州)에 기거하고 있었다. 1589년(선조 22) 9 월 사섬시정(司贍寺正), 봉상시정(奉常寺正)으 로 조정에 있다가 같은 해 12월 질병을 이유로 고 향에 돌아왔다. 참고로 임진왜란 발발 당시 박광 옥의나이는67세의고령이었다. 회재 박광옥의 의병활동에 대해서는 븮호남절의 록(湖南節義錄)븯의 기록이 가장 상세하다. 그의 이름은 호남절의록의 <고경명과 함께 창의한 제 공의 사실[同倡諸公事實]>편의 선두에 자리하고 있어 고경명과 함께 창의한 이들 중 박광옥의 위 상을 확인하게 해준다. 더욱이 호남절의록은 고 경명의 후손이 찬술한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박 광옥과 고경명의 관계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 다. 지금부터 호남절의록의 기록을 중심으로 그 의의병활동전반을파악해보도록하겠다. 박광옥은 선조가 한성을 떠나 피난길에 나섰다 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면서 여 러 날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하지만,호남절 의록 내의 다른 인물들에 대한 서술을 검토해 보 면,대성통곡하고곡기를끊고가만히있었던것같 지는 않다.소식을 듣자마자 광주목사 정윤우(丁允 祐)를찾아가대책을논의하였다.당시박광옥은그 의 문하생이었던 박희수(朴希壽,충주인)와 동행하 였는데,“적병이아직영(嶺)을넘어오지않은이때 에 요 충(要衝)을 방어 한다 면 나 가서 는 한 강에 서 막을 수 있고 물러나서는 영로(嶺路)에서 막을 수 있다. 지금 순찰사(巡察使: 이광)가 나주(羅州)에 있으 니 공 은 마 땅히 <순찰 사에 게> 가서 힘써 이 의 견을 알려 일의 때를 놓치지 않도록 하시오.”라 하 였다. 박광옥은 광주목사 정윤우에게 나주에 있는 전라 도 관찰 사 이광 과 함께 일 본군 을 시 급히 막 을 것을건의했던 것이다. 자신의 뜻을 광주목사에게 전달했을 뿐만 아니 라, 박광옥은 실제 의병활동도 병행하였다. 그는 거의(擧義)에 힘을 쏟기로 결정하고 건재(健齋) 김천일·제봉(霽峯) 고경명과 의논하여 의병청 (義兵廳)을 설치하고 정예 용사와 군량·군기 등 을 모으고 가정(家丁)을 내어 편오를 갖추고 자 제들로하여금수송을맡도록하였던것이다. 이렇듯 박광옥은 고경명과 김천일 사이에서 협 찬하여 의병 창의에 일조하였다. 그는 조광조(趙 光祖)의 문인이었던 유헌(遊軒) 정황(丁煌)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사암(思菴) 박순(朴淳),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제봉 고경명, 건재 김천일 등 당대의 명현들과 폭넓은 교유를 하고 있었다. 또한 화순의 최경운(崔慶雲)과 두 동생 경장(慶長)븡경회(慶會)등도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하고 글을 보냈는데 수신처가 고경명과 박광옥이었다. 박광옥과 최경운븡고경명 등은 기 대승을 매개로 인적 연결고리가 이어져 있다. 이 렇듯 박광옥의 다양한 인적 연결망은 전쟁 초 호 남의병의 결성에 있어서 빠지지 않고 논의해야 했던인물로자리매김했던것이다. 븮연보븯에 따르면 1592년 5월 25일, 박광옥이 도 내(道內)에 보낸 통문(通文)에 호응한 많은 의병 들이 관문(官門)에 모였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박광옥은 고령이었고 건강도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에 북진(北進)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는 상 황이었다. 이에 그는 호남 지방을 보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광주에 남기로 하였다. 군중 들은 박광옥으로 하여금 소모접제(召募接濟)즉, 후방에서 의병을 모으고 필요한 물품을 갖추어 지원하는책임자로삼았던것이다. 이제 박광옥은 본격적으로 의병도청(義兵都廳) 을 설치하여,부대를 정돈하고 군량과 병기를 모았 다.그는 부지런하고 성실한선비 수십 명을 선발하 여 여러 고 을로 보내 의 성(義聲)을 외치 고 격문 (檄 文)으로설득하여많은의병을모으도록하였다.예 를 들어 박윤협(朴允協)은 박광옥의 종질(從姪)이 자 제자였는데,임진왜란 때 박광옥의 격문을 지니 고서 원근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의병과 관군을 모 아서이를고경명의진중(陣中)으로보내었다. 김천일은 박광옥에게 글을 보냈는데, “전장에 나가 싸우는 것이나 고향에 남아 지키는 것이나 나라를 위한 것 아닌 것이 없소이다. 근본이 되는 땅[호남]이 한번 흔들리면 장차 어떻게 될는지 헤아리기 어렵게 됩니다. 우리들의 용병(用兵)의 유·불리는 오로지 귀하에게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여박광옥의활동을높이평가하였다. 븮음성박씨세보븯에 따르면 전라도관찰사 이광 (李洸)이 수원(水原)에서 파진(罷陣)한 이후 인 심이 크게 동요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 후로도 2~3차례 계속된 이광의 병력동원령은 실 효를 거두지 못하였는데, 전라도민들이 잠깐 모 였다가 흩어져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민심의 동 요는 광주목사 권율(權慄)이 군사를 일으키고자 격문을 내어 모집하였을 때에도 이에 응하는 사 람들이 없었던 데에서 적지 않은 파장을 남겼다. 이러한 때에 박광옥은 자제들을 여러 고을에 나 누어 보내 지역민을 잘 타일러 정병 수천을 모았 다. 권율이 이로써 출진하여 행주(幸州)의 대첩 을 이룰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음을 보더라도, 광 주내에서박광옥의위상은상당했다고보인다. 박광옥은 이러한 민심 이반의 원인을 전라도관찰 사 이광(李洸)에게서 찾았다. 이광을 처벌해야 민심 이 돌아올 것이라 판단했던 것 같다.그는 1592년 6월 의주의행재소(行在所)에상소(上疏)를하여용렬했 던전라도관찰사이광의죄상을고하였다. 박광옥이 주목한 이광의 죄상은 첫째, 7~8만의 관군을 이끌고 공주(公州)까지 올라갔지만 일본 군을 막고 나아가 서울을 지켜내지 못한 점이다. 박광옥은 이광의 관군이 만약 서울을 지켰다면 이후 경기를 보전하고 영남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러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 다. 둘째, 이광은 선조(宣祖)가 한성을 떠나 파천 했다는 소식을 듣자 파진(罷陣)해 버리고 맨 먼 저 전주까지 내려와 버렸다는 점을 들었다. 셋째, 이광의 용인(龍仁)전투 패배에 대한 것이다. 적 병이 수백명에 불과했지만, 겁을 먹고 후퇴를 하 면서 삼도(충남, 호남, 경남)의 관군이 흩어져 버 렸 다 는 것 이 다 . 이 로 인 해 호 서 (湖 西 ) 와 기 내 (畿 內)를 비롯한 지역의 민심의 이반도 격화되었다 고박광옥은이해했다. 븮회재집븯에는 이 소(疏)를 유사경(柳思敬)이 작성했다고 기록하였는데, 븮호남절의록븯에는 박 종정(朴宗挺, 함양인)븡정운룡(鄭雲龍)븡유사경 등이 함께 이광의 불충한 죄상들을 조목조목 짚 은 소(疏)를 만들어 박희수(朴希壽)로 하여금 용 만(龍彎) 즉, 선조가 있는 행재소에 올렸다고 기 술 되 어 있다 . 그런 데 이때 박희 수가 전 했던 이 상 소 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즉, “박희수는 험난한 바닷길을 따라 전하께서 피난하신 행재소에 도착 했으니 이날부터 호남지방과 함경북도의 소식이 비로소통하게”되었다는평가를받기때문이다.당 시 조정에서는 호남지방의 정보가 전해지지 않아, 근왕병에 대한 소식을 몹시도 고대하고 있었을 터 였다. 이러한 때에 박광옥이 박희수를 보내 호남의 소식이 선조에게 전해졌는데, 전황(戰況)이 소통 되 었다 는 점에 서 볼 때 대단 히 중요 한 계기 가 아니 었나 싶다. 선조는 매우 기뻐하면서 박희수에게 형 조좌랑을제수하였다. 당시 이조(吏曹)에서는 “김천일·고경명·정운룡(鄭 雲龍)·박희수·곽현(郭賢)·양산숙(粱山璹) 등에게 관 직을제수하는데대해서는하교(下敎)를받았고이미 승전(承傳)을 받들었습니다. 즉시 정원룡(鄭元龍)의 상소를 상고하니, 생원(生員) 유사경(柳思敬)과 진사 (進士)박종정(朴宗挺)은정운룡과연명(連名)이되었 습니다.그리고급제(及第)박광옥은고경명과함께의 병을초모(招募)하여그대로본도에머물고있으며,또 앞으로향병(鄕兵)을규합하려한다합니다.이세사람 은어떻게해야겠습니까?”라고하여유사경,박종정,박 광옥등을포상하는건에대해선조에게보고하였다.이 때선조는세사람은다른예에따라관직을제수하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박광옥은 7월 19일 승문원판 교(承文院判校)에제수되었다. 한편, 1592년 7월, 박광옥은 의승병 처영(處英)의 부대를 보내어 권율을 도왔다. 븮난중잡록븯에 따르면, 전라도관찰사 권율이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 (勤王)하려고 북쪽으로 달려갈 때 각 고을의 수령과 승장 처영 등이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처영은 1천 여명의 의승군을 이끌고 전라도 순변사인 권율의 부 대에합류한것으로확인된다.처영은권율과함께금 산 이치전투를 치르고,수원의 독성(禿城,독산성)을 거쳐행주산성에입성하여성을지켰다.권율은조방 장 조경(趙儆)과 승병장 처영에게 급히 성을 수리하 게하고전투태세를갖추었다. 1593년 2월 12일 일본군과의 행주전투가 시작 되었는데,특히 박광옥이 보낸 처영 부대는 산성에 서도 방어하기가 제일 취약한 서북쪽 능선을 담당 하여 결사항전으로 일본군을 막아 내었고, 행주대 첩이라는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도 그 공을 높 이 평 가하 여 정3품 절 충장 군(折衝將軍) 을제수하기에이른다.븮금산사지븯에는임진왜란때 의 공으로 “국일도대선사 부종수교 보광현랑 뇌묵 (國一都大禪師 扶宗樹敎 빡光玄朗 雷默)”의 법호 가 처영에게 내려졌다고 나와 있다.이러한 박광옥 의 후방지원에 대한 공로 때문인지, 1592년 7월 2 1일그는나주목사(羅州牧使)에제수되었다. 나주목사로 활동할 때에도 그는 의병을 모을 도청(都廳)을 설치하고 각 읍에 격문을 보내고, 군마(軍馬)를 점검하는 등 군량과 무기를 철저하 게 준비하고 있었다. 이와같은 후방의 철저한 전 쟁 준비와 후원은 전방에 나아가 일본군과 싸우 고 있던 호남의병들에게 정신적인 위안과 물질적 인후원이되었을것임은자명하다. 1592년 12월에는 일본군이 선조가 있는 행재소 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게 되었는데, 나주목사 박광옥은 다시금 정예병 2,000여명을 모았고 그 들은 12월 11일에 북상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박광옥은 다시금 나주목 사 직을 내려놓고 고향인 광주로 돌아왔다. 모은 병력은 권율과 김천일에게 나누어 보내주었다. 그야말로 박광옥은 자신의 건강보다는 선조와 조 선을 위기에서 구해내고자 헌신 하였던 것이다. 행주대첩 이후 권율은 박광옥에게 편지를 보내 문병을 하였는데, 아마도 그의 후원에 대한 감사 의 마 음 을 전 한 듯 싶 다 . 전쟁 초부터 노병으로 인해 고생하였던 박광옥은 한결같이후방에서병력과무기,병량미를모아전방 에서 활약하고 있던 김천일과 권율 부대를 후원하였 다. 나주목사를 역임하면서도 의병도청을 세워 이러 한역할을계속이어왔다.하지만,1593년10월26일박 광옥은결국68세의나이로세상을떠났다.본인의건 강은챙기지못한채로호남의병들의부족한병력,무 기,병량미등을지원해주기에여념이없었던박광옥 의안타까운마지막순간이었다. 1593년 박광 옥의 사 후 9년 , 전쟁 종 결 후 4년이 지 났을 즈음부터 박광옥에 대한 지역 사림 및 후손들 의 추숭활동이 전개되었다. 박광옥에 대한 추숭활 동이란 크게 2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사우 건립 과 사액 요 청, 둘째 는 그의 의병 활동 에 대 한 정당 한 평 가 및 포 상 등 을 들 수 있다 . 박광 옥을 모시는 사우는 건립되었고 ‘의열사’라는 사액도 받 아냈다.또한 박광옥에 대한몇 차례의 포상이 있었 다는 점에서 그들의 추숭활동은 나름의 성과를 거 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또한 서원철폐령 이후 일제강점기에 운리영당 재건, 벽진서원으로의 개 명 등 박광옥에 대한 추숭활동은 오늘날까지 계속 되고 있다.지금부터 박광옥사후 진행된그의 추숭 활동 을 시간 의 순서 에 따라 추 적해 보도 록 하겠 다. 박광옥 사후 10여년이 지난 1602년(선조 35), 지 방의 유림들은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벽진 마을[碧津村]뒤에사우(祠宇)를세웠다.벽진마을 은 1872년 지방 도 광 주지 도에 서 확 인되 며, 현 재 광 주광역시서구벽진동으로편재되어 있다. 유사경이 지은, 사당을 건립할 때 유생들이 순 찰사에게 올린 글[壬寅建祠時儒生上巡察使書] 에 따르면 “<박광옥은>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 을 저축하며 무기를 손질하여 의진(義陣)을 응원 하는 한편, 호남을 지켰습니다. 실로 고공(高公, 고경명)과 더불어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을 함께 하였으니 이른바 두 분은 전공이 같은 인물입니 다.”라고 하면서 박광옥의 의병활동에 대해 정리 하고 있으며, 고경명과 동일한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더불어 이 글에는 당시에 지역민 들이 고경명, 김천일, 박광옥을 “호남삼충(湖南 三忠)”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도 전하고 있다.1 604년에는 박광옥의 사당을 더 손질하고 벽진서 원(碧津書院)으로이름을바꾸었다. 같은해 1604년(선조 37)에는 광주(光州) 진사 (進士)이한용(李翰龍)등은소장을올려박광옥의 포장을요청하였다.소장에는“고(故)나주목사(羅 州牧使)박광옥은지난임진년에고경명·김천일등 과 서로 서찰(書札)을 통해 가며 군사를 조방하고 군량 을 저 축하 며, 무 기(武器)를 수 선하 고 여 염(閭 閻)을 드나들며 극진히 효유(曉諭)하여 군사 수천 명을 모집해 권율에게 보냈는데도 유독 포장(褒 奬)을 받지 못하였으니 원통합니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이에 선조는 공경(公卿)들에게 의논하게 하였고, 이원익(李元翼)·윤승훈(尹承勳)·유영경 (柳永慶) 등이 “이렇게 소장을 진달하였으니 반드 시 온 도(道)의 공론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절(死 節)한 사람과는 똑같이 대우할 수 없으니, 해조(該 曹)로 하여금 문안(文案)을 고찰해 보고 들은 말도 참작 해 보아 요 량해 서 포장 하게 하 는 것 이 무방 할 듯합니다.”라고 하였고, 임금이 이 의논을 옳게 여 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만 하더라도 박광옥에 대 한 실질 적인 포 장은 실 현되 지 못했 던 것 같 다. 한편 광주의 사림들은 박광옥을 모신 벽진서원 에 사액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븮광 해군일기븯에 따르면 1615년(광해 7) 9월 8일, 광 주(光州)의 진사 안경(安璥) 등이 상소하여 고 지평 박광옥(朴光玉)의 서원(書院)에 편액을 하 사해달라고청하였다는기록이확인된다. 하지만 박광옥을 모시는 사우가 곧바로 의열사 라는 현판을 받은 것은 아니었는데, 1678년 충장 공 김덕령(金德齡)을 추배(追配)한 이후 “의열 사(義烈祠)”라는이름으로사액되기에이른다. 이후 1680년(숙종 6) 동경연(同經筵) 이민서(李 敏敍)는, 주강(晝講)에 나아가 박광옥의 의병활동 에 대한 포장을 건의하였다.이민서는 “광주(光州) 사람 박광옥(朴光玉)은 바로 명종(明宗)·선조(宣 祖)때의 사류(士流)인데,문과(文科)출신으로 대 관(臺官)과 시종(侍從)을 지냈습니다. 임진란(壬 辰亂)을 맞이하여 고경명(高敬命)과 더불어 창의 (倡義)하여군사를일으켰으나,노병(老病)이있어 서 종군하지는 못하고 집에서 응접(應接)하며 규 획(規劃)한바가많았습니다.김덕령(金德齡)도또 한이 주(州)의사람인데,해를꿰뚫을충성과하늘 에 닿을 원통 함을 온 세 상이 악비 (惡飛)에 견 줍니 다. 주(州)의 사람들이 사당(祠堂)을 세워서 모두 제향(祭享)하니, 조정에서도 또한 마땅히 포장(褒 奬)해 야 할 것입 니 다 .”라 고 하 였 다 . 이민서가 일찍이 광주목사를 지낸바 있어서, 그 때에 박광옥의 의병활동에 대해 상세하게 알 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에 광해군은 해조 (該曹)에 명하여 대신들과 의논하여 사액(賜額) 하게 하였고, 대신 김수항(金壽恒)·김수흥(金壽 興)·정지화(鄭知和)·민정중(閔鼎重) 등이 모두 허락해야한다고답하여,그대로시행되었다. 의열사 사액에 대해서는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것으로 여겨지는 븮여지도서븯 전라도, 광주, 인물 (人物)조에 따르면,박광옥은 “박곤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목사에 이르렀다. 임진 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계략을 썼다. 승지 (承旨)를 추증했으며, 호는 회재(懷齋)이다. 벽 진(碧津)에 사우를 세웠으며, 조정에서 ‘의열사 (義烈祠)’라는 현판 이름을 내려주었다.”라고 되 어있음에서알수있다. 또한 1879년에 발간된 븮광주읍지븯 서원편을 보면 의열사(義烈祠) 항목이 나오는데, “주(州)의 서쪽 25리에 있다. 처음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을 향사(享祀)하다가숙종무오(戊午,1678)에충장공 (忠壯公) 김덕령(金德齡)을 합사(合祀)하여 의열 (義烈)이라 사액(賜額)하였고,갑술(甲戌,1694)에 충정공(忠貞公) 오두인(吳斗寅)을 배향(配享)하 였 으며 영 주 무신 (戊申, 1728)에 다 시 증지 평(贈持 平) 김덕홍(金德弘)과 증집의(贈執義) 김덕보(金 德普)를배향하였다.장의(掌議)2인,색장(色掌)2 인,원생(院生)20인 이었는데 고종 무진(戊辰,186 8)에철폐하였다.”라고기록되어있다. 한편, 사액의 과정에서 민정중(閔鼎重)의 <박광 옥븡김덕령의사우에사액하는데대한의[朴光玉金 德齡祠宇賜額議]>에 따르면, “박광옥(朴光玉)은 젊 어서 부터 몸 가짐 을 삼가 아 직 늙 기도 전 에 물러 나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선배들에게 존중을 받고 후배들에게 존경과 사모를 받았으며, 죽음을 앞둔 나이에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위해 왜적을 막았습 니 다. 그의 행 적을 따져 보 면 한 고을 의 선량 한 선비 가될뿐만이아니니,그의제사를받드는것은참으 로크게참람한일이아닙니다.”라고하였다. 또한창계(滄溪)임영(林泳,1649∼1696)이대신지 은 <고 지평 박광옥과 충용장 김덕령에게 시호를 내 릴 것을 청하는 소[請故持平朴光玉忠勇將金德齡贈 謚疏]>에는 “두 신하가 수립한 공적이 저와 같이 우 뚝하니의당시호를내려명호를바꾸어주는은전을 시행해서 권선(勸善)의 방도를 더욱 드러내야 하는 데 아직도 그런 일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 다.”라고 하였다. 기왕에 박광옥을 도승지로, 김덕령 을 병조판서로 증직하였고,의열사로 사액을 해주었 으니 그들의 공을 인정하여 시호까지 함께 내려주라 는 요구였던 것이다. 임영의 글에서는 “박광옥의 학 행과충절같은경우시종일관완전하고순수하여이 미한나라에서크게경모(景慕)하는바가되었고또 조정에서관직을증직해주는은혜도입었습니다.”라 는점을보아박광옥의학행과임진왜란때의의병활 동이가장중요하게인식되었음을알수있다. 하지만박광옥을모신의열사는1868년흥선대원 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 철폐되는 아픔을 겪는다.이에 후손들은 의열사를 어떻게든 이어 나 가려고하였다.1924년에발간된븮광주읍지븯서원편 에는 “이 때문에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의 영 정을운리(雲里)의본손재실(本孫齋室)로이안(利 安)하였다.그의자손들이다시별도의사우를지어 그 이름을 운리영당(雲裏影堂)이라 하였다.”라고 하여운리영당의존재를추가로기술하고있다. 이렇 듯 서 원 훼 철이 후 후손 들은 1927년 에 운 리영 당을 설립해 박광옥을 다시 향사하였다. 이후 도시 개발로 인해 1999년 묘소를 이장하고, 서구 풍암동 769-1번지에 운리사(雲裏祠)를 복설하였다. 현재 는 이곳을 벽진서원으로 이름하고 유림봉사(儒林 奉祀)를행해오고있다.광주광역시유형문화재제 23호인 회재유집목판(懷齋遺集木板)이 소장되어 있고,박광옥의영정(影幀)도모셔져있다. 지금까지 회재 박광옥의 임진왜란기 의병활동 과 이후 추숭 및 현창에 대해 살펴보았다. 홍직필 (洪直弼)의 븮회재선생유집서(懷齋先生遺集序) 븯에담긴내용으로글을마무리짓고자한다. 『회재 선생은 힘을 다해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 미를 모으다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고, 죽으면서 까지 나라를 걱정하였으니, 어찌 반드시 전쟁터 에서 피를 흘려야만 국가를 위해 죽었다고 할 것 인가.이 세상에서 회재 선생의 죽음을 고제봉[고 경명], 김건재[김천일] 두 분의 죽음과 다르다고 말하면그는이치를통달하지못한사람이다.』 [본 자료는 광주전남연구원 김만호 연구원이 발표한 자료로서 지면상 일부 생략후 중요부분만 기술하였음을알려드립니다.] 회재박광옥의의병활동과추숭 선조 유지를찾아븣 1.머리말 2.전쟁초박광옥의의병활동 ■박광옥의의병활동 븮호남절의록븯의박광옥부분 벽진서원의열사에봉안된회재선생의제향은봄에는유림에의해,가을에는후손들에의봉행된다.사진은지난달11일후 손들이제향후함께하고있다. 3.박광옥에대한추숭활동 4.맺음말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