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page


81page

4.3과 선흘리 - 김관후 선흘리는 농업이 주업으로 특히 축산업이 번창한 마을이었다. 방대한 규모의 선흘곶이 있어 땔나무가 풍부했고 반못과 골연못은 주민들의 식수와 우마를 키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선흘곶 일대는 아름드리 나무와 크고 작은 자연동굴이 있어 4.3의 난리를 임시 피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무장대의 영향이 컸던 중산간 마을이어서 토벌대의 주목을 받던 마을이었다. 소개 명령 이전부터 주민들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자 주민들은 모두 선흘곶 등으로 피신하기 시작했다. 선흘곶은 방대한 규모의 난대립 군락지에 자연동굴 등이 많아 주민들이 자연스레 피신처로 삼았다. 소개령 이후에도 숨어 있던 주민들은 굴이 하나둘 발각되기 시작하면서 대대적인 희생을 치루게 된다. 도툴굴 목시물굴 벤뱅듸굴 대섭이굴 등지에 숨어있던 주민들은 토벌대에 의해 발각되어 현장에서 수십 명이 희생되었고 나머지는 함덕대대 본부로 끌려갔고 그들 중 다수 주민들은 서우봉이나 북촌리 억물 등지에서 총살당한다. 소개령에 따라 함덕 조천 등지로 피난간 주민들도 도피자가족이란 이유로 함덕리 모래밭 등지에서 많은 희생을 치룬다. 1948년 11월 21일 마을이 전소해버리자 주민들은 낙선동에 성을 쌓고 함바집을 지어 집단거주를 시작했다. 1954년 통행제한이 풀리면서 주민들은 마을을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정부가 확인한 선흘리 4.3 희생자는 2백 십 여명에 이른다.